top of page
시1

​<특집> 내가 읽은 4.3시 ㅣ 김진철 추천

다시, 4월

 

 

저들의 슬픔을 나는 모른다

위령제가 열리는 4•3 평화공원의 추념광장 그 한 켠,

나는 엄지손톱 만하게 몸을 여는 앙상한 벚나무 아래 서서

의자에 나란나란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저들의 슬픔을 나는 모른다

확성기를 통해 축문이 흘러나올 때

횐 저고리를 입은 유족의 어깨가 떨린다

그 가녀린 떨림이 검은 넥타이를 맨 유족들의 어깨로 옮겨간다

기어이 수많은 의자들이 물결을 이룬다

물마루와 물마루 사이에 갇혀 떠돌던 슬픔,

그 슬픔 위로 4월의 햇살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누군가 황급히 위령제단 앞으로 뛰어간다

서둘러 분향을 마쳐야 할 까닭이 없는 나는

여전히 앙상한 벚나무 아래 서 있다

저들의 슬픔을 나는 모른다

- 우리 집은 소개를 당하지 않았고

내가 태어나던 시각에 아버지는 마을 외곽의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화살촉처럼 돋아난 보리순을 밟으며

아이들과 연을 날리고 돌아온 날

보리밭 한가운데서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얼레를 감고 풀며 밟아버린 보리순처럼

쭈빗쭈빗 돋아나던 소름이 고작이었던 나는

저들의 슬픔을 아직 모른다

다시 4월이다

해마다 4월이면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추념광장으로 모여들어 하나의 원을 만든다

버스를 좇아온 햇살들도 저들과 함께

저마다의 사연들을 풀어놓는다

合一이란 너와 내가 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

合一이란 산과 바다가 합하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

合一이란 저렇게 하나의 원을 이루는 것

마음은 벌써 그 한가운데를 향하여 치닫지만

나는 여전히, 이제 막 몸을 열고 있는

벚나무 아래 엉거주춤 서 있다

​​​

​​

정군칠  

제14회 전국민족문학인 제주대회 기념 시선집 <뼈를 잇고 살을 붙여 피를 돌게 하고>(제주작가회의 편, 각, 2005) 中​​

​​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