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물들기 좋은 섬, 가을의 표정
가을인데 아침 공기가 서늘하지 않다. 열대의 스콜 같은 소나기가 흩뿌리고 지나고 금세 햇빛이 쨍쨍하다. 9월인데 여전히 후텁지근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여름이 길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상 기후 역시 기후위기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러한 시대에 문학은 기후위기를 감각화하고 서사화할 책무가 있다. 숫자나 통계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 두려움, 윤리적 책임감 등을 언어로 나타내야 할 것이다.
사실 기후위기라는 말이 나오기 전부터 문학은 생태적 상상력의 글쓰기를 이어왔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넘어 자연, 동물, 기후, 물질까지 포괄하는 감수성을 생각해왔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인간의 배경이 아닌 또다른 생명체로 인식하게 하는 것인데, 공존만이 아니라 함께 교차하는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것이 기후 불평등이다. 자본주의는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계층을 나누고 지배해왔다. 제주도는 몇 년 전부터 ‘15분 도시’를 내걸고서 탄소중립과 연결하여 도시 조성 계획을 중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진행 상황을 보며 의아한 점이 많다.
제주도는 섬식 정류장에 이어 노형 오거리에 공중보행로를 설치할 계획이다. 버스를 타는 사람이나 걷는 사람은 더 멀리 걸어야 한다. 자동차가 빨리 가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사람은 멀리 돌아가라는 말인가.
기후위기 시대의 문학은 기술이나 발전 대신 느림, 공존, 순환의 언어를 회복하려고 시도하는데, 이 섬의 언어는 여전히 개발, 빠름, 차별, 직진의 언어만을 시도 중이다.
제주의 바다는 어떤가. 바다 사막화라 불리는 갯녹음이 번지면서 해녀들도 바다의 위기를 말한다. 올해 여름에는 푸른우산관해파리 때문에 해수욕을 하는 것에 큰 지장이 있었다.
산업화 이래 경쟁적인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의 욕망은 염증을 불러일으켰다. 코로나 역시 기후위기와 함께 근본 원인이 같다. 무분별한 개발과 착취에 의해 지구는 병들고 있다.
한화는 애월 포레스트라는 이름으로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에 막대한 돈을 들여 호텔리조트·테마파크 등의 복합 관광단지를 조성한다. 한라산 중산간 지역은 법적으로 개발을 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제주도가 제도를 개선해 허가를 내주면서까지 무리하게 강행 중이다.
서귀포시는 서귀포관광극장을 철거하려다 반대 여론이 크게 일자 굴착기를 멈춰 세웠다. 서귀포관광극장은 1963년 문을 열었고, 지역 주민들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으로 사랑받아왔다. 제주시 현대극장도 그렇게 허무하게 허물더니 서귀포관광극장의 외벽이 부서진 모습이 사람의 어깨가 부서진 것만 같다.
기후위기는 곧 제주의 위기이다. 지금은 회복의 언어가 필요할 때이다. 우리는 다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다의 침묵, 나무의 호흡, 돌의 느린 시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제주는 가장 먼저 파괴되거나 가장 먼저 회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섬이다. 언어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는 이 섬에서 오늘도 우리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 문학웹진 ‘산15-1’ 산지기 현택훈
2025 가을

문학웹진 <산15-1>은 제주 한라산의 주소에서 이름을 딴 제주 기반의 계간 문학 웹진입니다. 섬과 산이 가지는 상징을 문학의 바다에서 풀어보고자 2017년 제주문학동인 ‘시린발’에서 출발하여, 시옷서점과 제주도 내 개발자 모임의 도움으로 산15-1에 도달하였습니다. 계절마다 발행하며, 내부 필진과 외부 필진의 작품을 골고루 수록하고, 때로는 의미 있는 작품을 재조명하기도 합니다. ‘산15-1’은 소외된 시간과 공간을 묵묵히 견디며 글을 쓰는 작가들의 문학적 성취를 응원합니다.
만드는 사람들
등짐꾼 : 김신숙(시인)
산지기 : 김진철(동화작가), 김혜연(시인), 오광석(시인), 이재(사진작가), 현택훈(시인), 홍임정(소설가)
디자인 및 편집 : 이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