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태국여행기 7~9
2017년 10월 5일-태국여행기 7
돈 아끼는 데 재미 들리면 거지꼴 못 면한다 5
아직 축축하게 젖어있는 빨래들을 캐리어에서 꺼내 최대한 어디에도 닿지 않도록 옷걸이를 이용해 널어놓은 후 나는 서둘러 숙소 밖으로 나갔다. 밖은 선데이의 태양이 한창 작열하는 중이었다.
단 십 분도 머물고 싶지 않을 정도의 숙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갈등 중이었다. 내일 다시 그 쾌적했던 숙소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돈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내 마음속엔 또 다른 것도 있었다. 나는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반쯤 읽었던 체홉의 사할린 섬 여행기나,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조지오웰의 온 몸을 굴리며 쓴 산문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조지오웰은 탄광이나 공업지대 같은 곳 뿐 아니라 심지어 노숙자수용소에도 기꺼이 들어갔었다. 그곳들에 비하면 만원의 돈을 내고 묵는 여행자숙소는 아주 양호하고 평범한 곳일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졌고 하루 만에 이곳을 떠난다면 자격 미달의 책상쟁이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치앙마이의 모든 여행자들이 다 몰려나온 것만 같은 선데이마켓(치앙마이의 중심거리에서 일요일마다 열리는 큰 규모의 시장)의 발 디딜 틈 없는 뜨거운 거리에서 나는 고민에 휩싸인 채 인파에 휩쓸려 다녔다. 그렇지만 밤이 늦도록 선데이시장을 뱅글뱅글 돌고만 있었던 것은 그러저러한 고민과 사색 때문이 아니라 골동품들이 즐비한 그 어두침침한 숙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2017년 10월 6일-태국여행기 8
돈 아끼는 데 재미 들리면 거지꼴 못 면한다 6
마치 조지오웰이 나를 시험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웰 아저씨가 조그만 나무탁자에 비스듬히 앉아 나를 채점하고 있다.
선데이마켓을 뱅글뱅글 도는 와중에도 나는 적당한 호스텔이 보이면 문을 열고 들어가 “Have room? How much?” 하며 안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그래서 새로 발견한 500밧 정도의 깨끗한 호스텔도 두엇 있었고 내일 당장 예약해둔 빨래 잘 마르는 방도 있었건만 나는 무엇 때문에 밤늦도록 발을 질질 끌며 오웰 아저씨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 낯선 도시의 밤거리에 인적도 뜸해지고.
골동품숙소가 있는 블럭에 이르렀을 때 나는 우선 오늘 하룻밤을 내 자신에게 맡겨보기로 하고, 불이 모두 꺼진 상점 사이에 어두침침한 불을 밝히고 있는 1층 매장의 문을 열었다. 카운터에는 밤 근무자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몸집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태국인 특유의 짙고 검은 머리색과 눈썹, 그리고 큰 덩치에도 오묘하게 여성적인 느낌이 나는 청년은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는 정수기의 위치를 묻자 카운터 안쪽의 커다란 보온병을 가리켰다. 새벽에 글을 쓰며 커피를 마실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순간, 하루 동안 쌓였던 갈등들이 한순간에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낮에 대수롭지 않게 보았었던 액자 속의 국왕 일가의 사진들이 깊은 밤 어두침침한 불빛 속에서 유령처럼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밤 이들과 마주쳐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기 싫었다. 그러고 보니 2층 복도에 줄지어 걸려있는 코카콜라 광고 속의 여성들도 하나같이 입술이 붉게 채색되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복도를 지나 방에 들어간 후 내일 새벽 일찍 이곳을 떠날 생각에 짐부터 꾸렸다. 그땐 이미 오웰 아저씨도 겁을 먹고 달아나 있었다.
곰돌이 이불도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 놓고, 텅 빈 자줏빛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자면서 한 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깰 때마다 검은 천장 위로 그보다 더 검은 넓은 활엽수 그림자가 바람에 불길하게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의 우상 조지오웰은 47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2017년 10월 7일-태국여행기 9
잠을 잘 수 없다!
숙소 이야기는 이제 지겨우니까 그만하기로 하고.
태국에 온 지도 어느덧 9일차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다. 하룻만에 돌아온 쾌적한 숙소에서 그대신 부족해진 하루치 여비를 아껴가면서 8:2의 불균형한 안정을 누리고 있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동안 생활의 패턴도 생겼다. 글쓰기, 산책, 잠으로 제주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단순한 일과다. 물론 그 내용 속에는 글쓰기의 괴로움과 날씨의 변덕과 무더움과 복잡한 골목들 그리고 간헐적인 잠이 있지만.
제주에서의 일상은 거의 한 시간 단위로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하는 생활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되는 집안일을 비롯하여 은행일, 장보기, 글쓰기, 도서관일, 행사일, 출판사일 등등. 특히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일들을 마감한 후라야 했으니 주로 수면시간을 떼어내곤 했다.
사실 남편이 이 여행의 길을 열어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수면을 줄여 까무라치는 표정이 될 때마다 남편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외치며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해졌었다. 그리곤 이 여행의 계략을 세웠던 것이다.
글만 실컷 쓰고 푹 자라는 남편의 고마운 마음을 안고 태국의 소도시 치앙마이에 왔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잠을 도저히 잘 수가 없다.
원래의 목적대로라면 낮에는 조용한 카페에서 하루 종일 글을 쓰고 밤에는 쾌적한 숙소에서 푹 자야 한다. 하지만 해외여행을 거의 못해봤던 나로서는 저 신비로 가득한 이국의 거리를 두고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제주에서와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시간으로 수면을 떼어 쓰고 있다. 제주에서는 그나마 내일의 일과를 위해 적당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여기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으니 밤을 꼬박 새고는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잠시 한 두 시간만 눈을 붙인 후 까무러치는 발걸음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이 생활에도 패턴이 붙었으니 이것도 안정이라면 안정이겠다.
하루의 패턴을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글을 쓰며 밤을 새운 후 식당으로 내려가 무료로 제공되는 조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두어 시간 눈을 붙인다. 그리고는 외출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 하루종일 정처없이 떠돌다가(정처없이 떠도는 이 시간에 사실 글을 써야 한다) 저물 때쯤 들어와 씻고 무언가를 먹고 8시쯤 눈을 붙인다. 그리고 밤 10~12시 사이에 일어나면 다시 돌아오는 하루의 시작. 여행 욕심 때문에 글 욕심 때문에 나는 여전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제주에서나 치앙마이에서나 글을 쓰는 건 언제나 수면을 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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