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선이, 그림 정지윤 <마두의 말씨앗>
말씨앗이 찾아준 가족의 행복
「마두의 말씨앗」은 제주신화에서 생명의 꽃이 자라고 있다고 하는 서천꽃밭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 마두는 아빠에게 서운할 때마다 아빠를 바꾸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느날 꽃감관이 나타나 마두의 소원을 들어준다. 마두는 자기와 잘 놀아주는 아빠를 원한다. 새로운 아빠는 마두가 즐거워할만큼 잘 놀아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경제능력이 없어서 필요한 것들을 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두는 돈이 많은 아빠로 바꿔달라고 한다.
돈이 많은 아빠는 마두가 원하는 것을 모두 사준다. 그런데 이번 아빠는 아주 엄격했다. 아빠가 일일이 관여를 하자 견딜 수 없었던 마두는 자기 말대로 해주는 아빠로 다시 바꿔달라고 한다. 세 번째 아빠는 마두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랬더니 늦잠을 자서 학교에 지각을 하는 등 마두의 생활이 엉망이 되고 만다. 마두는 역시 진짜 아빠가 최고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진짜 아빠를 되돌려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아빠를 바꾸는 소원을 빌면서 아빠와의 기억은 점점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래서 마두는 아빠꽃밭에 가서 진짜 아빠를 찾아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두는 아빠꽃밭에 도착을 했는데, 기억을 잃은 마두는 수많은 아빠꽃들 중에 어느 꽃이 아빠 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마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어렸을 때 걸린 병 같이 자신과 아빠만 알 수 있는 특별한 경험으로 아빠 후보를 골라내고, 마지막은 자신과 얼굴이 닮은 꽃을 찾아 진짜 아빠를 찾아낸다. 그리고 마두는 잠에서 깨어난다. 마두는 꿈을 꾼 이후 더이상 예전처럼 험한 말을 쓰지 않게 된다.
이 동화는 표면적으로는 아이들의 부정적인 언어 습관이 우연히 꿈을 꾸는 과정을 통해 교정이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사실 그 이면에는 어른들에게 주는 메시지도 있다. 아이들이 이렇게 새로운 아빠를 요구하는 것은 실제 부모와 자식 간에 같이 공유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면서 아이들은 가족보다 학교, 어린이집, 유치원, 학원 등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럴수록 아이들과 부모 사이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동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아무데나 빗줄기가 스며드는 곳이면
보따리를 풀고
건조한 바람에 실려 온 고단한 몸을 부렸다
얼마나 깊이 내려가야 발이 닿을지
닫힌 문 앞에 마냥
서 있었다
관절마다 갈퀴 같은 옹이박이고
텅 빈 뱃속을 드러낸 팽나무가
속절없이 예각으로 기울 때에도
나 여기 끄떡없이
서 있었다
강물은 깊어 돌을 굴리지 못하고
온몸으로 쓰다듬고 지나가지만
왔던 길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스름 땅에 납작하게 붙어
도도하게 하늘 향해 주먹 내지를 때
뿌리는
묵묵히 깊은 우물물을 길었다
내 몸이 긴 그림자 비울 때
둥근 바람을 받아 날기 위해
깃을 팽팽하게 세우고
처음부터 나 여기 꿋꿋이 서 있었다
「민들레처럼」 전문
제주라는 갇힌 공간에 십몇 년 전부터인가 이주민들이 크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정체되어 있던 인구도 물 차오르듯 차올랐다. 여러 매체의 영향으로 제주살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한 이주민 중에는 잠깐 살며 제주의 겉멋만을 보고 다시 시들해져 섬을 떠난 사람들도 있지만, 이곳 제주를 또 다른 고향처럼 여기며 삶을 이주한 이들로 있었다. 조직형 시인도 그러한 이주민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왔을 때 항상 제주민들이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제주민들의 잘못도, 이주민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참혹했던 제주의 과거가 그리고 현재도 벌어지는 난개발이 제주민들의 시선을 날이 선 창처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초기의 차가운 시선들을 이겨내고 제주의 지난 상처들과 또 새로이 생기는 상처들을 배우며 그녀는 제주의 시인으로 우뚝 섰다.
‘민들레처럼’은 박노해 시인이 작품을 발표한 이후 민들레의 이미지가 굳어져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여타 다른 작가들도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쏟아내거나 아니면 그와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직형 시인의 ‘민들레처럼’은 기존의 다른 작품처럼 투쟁하는 민들레나 노동자의 민들레가 아닌 뭔가 새로운 민들레를 연성해 내었다. 그녀의 민들레는 마치 이주민의 민들레처럼 보이기도 하고 온갖 풍파를 견딘 후의 민들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가 제주에서 풍파를 이겨내고 우뚝하고 꿋꿋이 서 있는 민들레가 되었을 때 그녀는 제주의 시인이 되었다.
얼굴을 가리고 일어서는 마음이 있다
살짝 어깨를 받쳐주기만 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데
누워 쉬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면
견디고 있는 눈물까지
빼앗는 것이다
동백꽃은
제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송두리째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동백꽃이 송이째 떨어지는 이유」 부분
백현진의 노래 '빛'
‘유앤미 블루’를 아는 사람은 1990년대를 청춘 시기로 방황한 사람일 것이다. ‘유앤미 블루’는 방준석과 이승열 둘이서 1994년에 데뷔했다. 우리나라 모던 록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어야 팀이 ‘유앤미 블루’라고 호언장담하고 싶다. 방준석은 음악감독을 하면서 백현진과 함께 ‘방백’을 만들었다. 2022년에 방준석은 숨을 거두었다. 백현진은 장영규와 함께 ‘어어부 프로젝트’로 활동한 적도 있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름들의 공통점은 영화 음악에 관여했다는 점이다. 물론 영화음악을 말할 때 강기영(달파란)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역시 방준석, 장영규 등과 함께 ‘복숭아’를 결성했다. 그러니까 1990년대 모던 록을 바탕으로 음악활동을 하던 이들이 대부분 영화음악계에서 운신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백현진은 연기도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로 빌런 역할로 목하 각광을 받는 중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오 상무’, ‘무빙’에서 ‘진천’, ‘모범택시’에서 ‘웹하드 회장’ 등이 백현진이 맡은 역할이다. 주로 갑질하는 직장 상상 역할을 맡는다. 나도 처음에 그를 드라마에서 봤을 때 그가 ‘방백’의 백현진인 줄 몰랐다. ‘방백’의 노래를 들었으면서 말이다.
백현진의 연기를 보면 대개 너무 현실적인 연기에 놀라게 된다. 그가 연기를 소름 돋게 잘한다고 해서 그의 음악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산울림의 김창완처럼 음악도 연기도 준수하다. 2019년 낸 정규앨범 ‘가볍고 수많은’에 수록된 노래 ‘빛’을 반복해서 듣는데 알전구 하나 내 어두운 곳에서 불을 밝히더라. “말을 하다가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잃어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니 저기 모서리가 있네/ 세 갈래 빛이 거기서 고요히 흐르네” 말을 하다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말을 하지 않고서 모서리를 봤는데 그 모서리에서 빛이 흐른다는 노랫말이다. 그러니까 살다가 안타까운 일이 생겨 되돌아보니 한 갈래도 아니고 세 갈래 빛이 흐른다는 것으로 들린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안타까운 장면들을 목도해야만 하는가.
“그 태양 아래에는 바로 네가 서 있네/ 너로부터 오묘한 다정한 세 갈래 빛이/ 내 눈 속으로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아주 깊숙이 스며서 머무네/ …… / 머무네 머무네 뱅뱅 머무네” ‘너’는 어떤 존재일까. ‘너’는 어쩌면 안타까운 일의 당사자 아닐는지. 그래서 ‘오묘한 다정한 빛’이 난다. 그러한 빛이 ‘나’의 ‘눈’과 ‘머리’와 ‘마음속으로’ 들어와 ‘뱅뱅 머문다’. 한 갈래가 아니라 세 갈래라고 한 것은 복수(複數)의 파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래야 닿을 수 있는 여지의 한계로 우리는 살아간다. 살아남은 자의 길에 남은 ‘빛’이다. 미디어는 빛에 의해 현현(顯現)하니 백현진과 친구들에게는 필름이 또한 빛이겠다. 그리고 백현진은 악역으로 귀양풀이를 하는 것일지도. 그러니 그의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 표현은 이러한 아픔의 음악이 기저에 있어서 울렁거리는 표현양상일 것이다. 대중음악에서 주류가 되지 못한 1990년대 모던 록은 영화음악 시장의 요구에 따라 그곳에서 자신들의 음악 작업을 할애했다. 영화 ‘변산’(2018), ‘님은 먼 곳에’(2008), ‘라디오 스타’(2006)는 모두 공교롭게도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인데, 이 영화들 모두 음악감독은 방준석이다.
남화숙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부산 영도에는 한진중공업1)이 있다. 대중들에게는 2012년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85호 크레인 위로 올라간 작은 체구의 해고 노동자 김진숙을 지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십 대의 희망버스들이 몰려간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을 더 거슬러 2003년에는 같은 85호 크레인에서 129일 동안 고공 농성을 하던 김주익 지회장이 운전석 쇳기둥에 밧줄을 걸고 목숨을 끊었다. 또 김주익 지회장이 열사가 된지 한 달 후엔 절망에 못 이긴 곽재규 조합원이 크레인 옆 도크 바닥으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우연인지 십여 년을 또 거슬러보면 1991년에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박창수 위원장이 대기업 노동조합들과의 연대를 도모하던 중 안기부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위의 일들은 한진중공업의 노동조합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어용 노조를 몰아내고 민주 노조를 세운 후 겪었던 큰 사건들이었고, 그 십 년 단위들 안에서 일상처럼 흩뿌려졌던 전단지들과 대자보들, 깃발과 현수막들에 대해선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지난 날 부산역에서 영도대교를 지나 한진중공업까지 이어지는 대로에서 푸른 작업복을 입은 성난 조선소 노동자들의 행렬을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진숙의 희망버스로부터 다시 한 강산이 흐른 2024년 현재, 한진중공업 노동조합2)은 과거의 고난들과는 결이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명박 정권 때 복수 노조 제도가 시행된 이후로 회사가 주도해서 만든 노동조합에 조합원수가 밀려 대표 노조를 빼앗겼다. 따라서 교섭권을 상실한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노동조합 사무실도 상근자 한 명이 겨우 지키고 있다고 한다. 관계자로부터 살짝 엿들은 말에 의하면 올해엔 지회장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선거마저 치르지 못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상태다. 어찌보면 고난과 시련보다 더한 절망과 무기력인데, 조합원들과 그것을 함께 나누기엔 각자 개인적인 생활로 바쁘다. 지난 여름 나는 한진중공업 노조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2층짜리 대형 주차장 건물 안 한 켠에 (꼭꼭 숨겨져) 있는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창밖에서 일제히 들려오는 퇴근하는 자동차들의 어마어마한 소음들이 어쩐지 매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작년부터 한진중공업과 가까운 곳을 종종 오가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남편이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고향인 부산에 작업실을 얻었는데 우연히도 영도대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앙동 인쇄소 골목이었다. 성냥곽 같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만 걸으면 저 멀리 조선소의 거대한 철근 구조물들이 보인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정오가 되면 조선소의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섬을 건너와 작업실 근처 부둣가까지 울려퍼진다고 한다. 가끔은 오랫동안 정박해 있던 배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목격한다는데, 아마 건조를 마친 배가 드디어 바다에 띄워지는 장면일 것이다. 2024년 한진중공업의 오늘이 어제와 같고, 어제는 또 그제와 같고, 그렇게 지나간 모든 날들이 노동하고 밥을 먹으며 배를 만드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하다. 낮 동안에 침묵만 고요히 내려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면 창밖으로 퇴근하는 차들만 쌩쌩 지나가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사무실의 오늘도 옛날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왔던 것만 같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부터 근 십여 년 전까지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부산 지역 뿐 아니라 전국의 노동조합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성 노조였고, 그만큼 휘몰아치는 탄압에 총알받이가 되어 쓰러지기를 반복해 왔다. 그래서 비록 지금 힘이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일지라도 지난 날의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역사를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깊게 뿌리내려 온 운명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꺾이거나 베이지만 않는다면 새 봄을 기약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987년 이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이 강성 노조로 우뚝 선 것도 시대적 상황에 돌연 접붙여진 것이 아닐 것이고, 그 이전의 뿌리가 없을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남화숙의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남화숙 지음·유남관숙·남화숙 옮김/후마니타스)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이 언제부터 어떻게 뿌리내려 왔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1937년 일본 강점기 시기에 ‘조선중공업’으로 설립되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정부로 이관되어 ‘대한조선공사’로 개편되었다가 1990년 ‘한진중공업’으로 바뀌어 현재 ‘HJ중공업’에 이른 영도 앞바다의 오래된 조선소의 이야기는 그 길고 긴 역사만큼이나 노동조합의 역사가 팽팽하게 전개되어 왔다는 데 우선 놀라고, 이 책이 특히 조명하고 있는 1960년대의 민주노조 운동(부제:박정희 시대의 민주노조운동과 대한조선공사)이 1987년 이후의 민주노조 운동 못지 않게 활발했다는 데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국영기업에서? 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당시 대한조선공사 노조는 회사를 상대로 밀린 임금에 대한 민사소송을 내어 회사의 재산압류 결정을 얻어낸다거나, 퇴직금 누진제도를 관철시킨다거나 하는 일들을 거침없이 해나갔다. 또 당시에 노조는 임시직 노동자들에게도 조합원 자격을 주고 단체협약이 적용되도록 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했는데, 1968년에 회사가 임시직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자 전면파업과 부분파업을 수시로 벌이며 1년 가까이 투쟁했다. 당시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의 중요한 기풍 중의 하나는 하후상박(下厚上薄, 아랫사람에게 후하고 윗사람에게 박함)의 희생정신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1960년대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의 기백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사건들이 450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에 꼼꼼하게 적혀 있는데, 이 역시 당시 노조가 기록들을 체계적이고 훌륭하게 정리해 놓았기에 가능했다. 이 책을 쓴 역사학자 남화숙은 노동운동의 젠더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한진중공업 노조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캐비닛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는 대한조선공사 시절 노동조합의 방대한 회의록 자료들을 발견하고 놀라움과 함께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대부분 한자로 쓰인 ‘하나이다’ 체의 고문서 같은 회의록 안에서 보통은 노동운동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1960년대의 노동조합이 이토록 전투적이고 개혁적인 목소리들을 내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글쓴이가 학자로서 느꼈을 희열과 설렘이 상상이 간다. 그 들끓었던 옛 목소리들을 복원해내어 박정희 정권의 그림자로 뒤덮였던 1960년대 암흑기에도 어느 섬의 조선소 노동자들은 빛을 꺼뜨리지 않았다고 증명해준 역사학자 남화숙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출발한 그 빛은 오늘날,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와 퇴근하는 차소리와 함께 하루가 지나는 동안 고요한 침묵만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는 그곳에도 결국엔 와닿을 것임을 믿는다. 뿌리가 있는 빛이므로.
1) 최근에 소유주가 다른 곳로 넘어가면서 이름도 ‘HJ중공업’으로 바뀌었지만 ‘한진중공업’이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일단 그대로 쓰기로 한다.
2) 기업별 노동조합이었던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2001년 산업별 노동조합인 전국금속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2002년에 가입하여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이런 명칭 구분이 복잡하므로 여기서는 일반적인 의미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이라 부르기로 한다.
앙리 까르티에-브레송 <내면의 침묵>
사진 작품을 볼 때 관람객이 왜에 집중하는 동안 사진가는 어떻게에 몰입하기도 하는데 가치판단은 간결하고 쉬워야 한다는 나의 관점에선 일차적이고 바람직한 반응이다. 화두를 던지는 것은 작가이지만 현대의 예술은 그의 역할을 많이 축소시켜 왔고 감상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말인즉, 나는 내가 받들어 마지않는 나의 오해와 나의 곡해를 십분 존중하여 나만의 소화력을 단련시킴에서 오는 희열과 기쁨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나에게 <내면의 침묵>은 제목 그 자체로 사진이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지, 사진이 왜 시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좋은 표본이기도 하다. 충분조건임에도 필요조건은 아님을 개의치 않을 때, 그야말로 시선과 시선 사이에 있는 빈틈을 공략할 때, 사상과 사상 사이의 괴리를 이을 때, 시간과 시간 사이의 균열을 보상할 때 사진의 시적 기능은 극대화된다. 거기서 한 번 더 나아가 그 기능을 빼버리자. 그러면 독자적으로 남을 무언가가 된다. 시이자 음악으로 비견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생소하고도 지속적인 향으로 치환되기를 사진은 바란다.
그 자리에 몇 명의 사진가를 세운다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빠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리고 나의 책장에서 은은한 존재감을 오랫동안 내뿜고 있으므로, 이런 지면에 싣기엔 투메(Too Mainstreem)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사진 씬이 과연 메인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으므로, 게다가 시대의 특출한 초상사진들이 엄선되어 있으므로, 이 사진집은 당신과의 현실적인 거리감이 까마득하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 당신의 빈곤과 여유 바깥에서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ㅡ겉표지엔 사무엘 베케트의 형형한 눈빛이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고ㅡ꽤나 멋스럽다는 바로 그 점을 매우 높이 산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어떤 상황이든, 내가 무엇이든 개의치 않는 점을 들어 예술의 일반적인 매력을 설파하거나, 그것을 손쉽게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고 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 예술의 불편한 성격임을 증명하지 않더라도, 어떤 경우엔 눈엣가시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흔처럼 주방이나 거실, 화장실에까지 따라오는 그들의 집요함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리뷰를 일반론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다시 사진으로 귀결시키기 위해 약간 주의를 환기하자면 사무엘 베케트의 눈길이 멈춘 곳은 현실세계가 아닌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ㅡ여기서 나의 상상과 추론을 더하여ㅡ폐쇄적이고 자폐적이었던 괴팍한 작가가 렌즈를 피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ㅡ이전에 분명 그 렌즈를 한 번 째려보았을 것이고ㅡ그의 시선 끝에 매달린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유로, 엔드게임이 아니고 고도였을 것이다. 오독의 즐거움과 위험성을 우회하기 위한 결론은, 그리하여 워낙 드러내어지는 것을 싫어하던 불멸의 작가는 이 세계가 아닌 이(異)세계에 머문 모습이 박제되었다는 것이다.
브레송은 잠깐의 방문 또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 초상사진을 남겼고, 물론 그들이 브레송의 이름과 직업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거기엔 어떤 껄끄러움이나 수줍음, 난처함이나 당당함 같은 것들이 깃들어 있고 그것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으려 하는 점에서 이 찰나는 재미를 품고 있다.
거기엔 조르주 루오의 중절모,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침실에 걸린 초상화, 퀴리 부부의 모아 쥔 손, 박제된 곰 옆 유리창에 비친 루이 퐁스의 옆얼굴, 아서 밀러의 스탠드, 르 클레지오의 오른 손목에 찬 시계,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귀,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안경 그림자와 파이프의 각도 같은 것들이 어떤 절대적 원칙을 가진 양 각각의 인물의 특징을 보여주고, 찰나의 장면이 품고 있는 앞뒤의 이야기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낀다. '사진의 완성'이란 말은 어떻게든 쓸 수 있지만, 결국 찰나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그 한 장면이 긴 시간을 품고 있는 하나의 서사가 되었을 때 혹은 무엇도 나타내지 않는 침묵이 되었을 때 비로소 완결된 사진ㅡ완성은 아니고ㅡ이랄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면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문장을 되뇐다. 찰칵찰칵을 끊임없이 멈추지 않는 행위에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하고 적의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개의치 않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이 또다른 사진적 재미의 요소가 개시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 왜 사진을 찍는지, 사진을 왜 찍는지, 왜 찍혀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의미가 없어지고ㅡ이미 지나가버렸으므로ㅡ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를 부여해버렸다. 브레송은 퀴리 부부를 찍은 날을 이렇게 술회한다.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그러자 나는 셔터를 누르고 나서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했다. 별로 예절바른 짓은 아니었다."
그 순간의 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부부의 표정은 내면의 침묵으로 널리 남았다.ㅡ'영원히 남았다'라고 썼다가 오류를 인지하고 수정하였다.
분분한 과정들이 있지만 니세포르 니엡스와 루이 다게르에 의해 사진술이 처음 알려지던 해 라이프치히 신문엔 이런 기사가 났다. "찰나적인 영상을 고정시키려고 하는 시도는 독일에서 철저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그런 것을 바라는 마음 자체가 이미 신성모독이다."1)
신성모독의 정도는 경미해졌더라도, 합의 유무에 관계없이, 찍는 행위엔 일종의 결례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제대로 예견했다. Shot은 명사이면서 동시에 동사이기도 하고, 사진이 좀, 좀 그렇다. 내면의 침묵 이야기는 다른 자리에서 더 하거나 말도록 하자. 이 책보다는 사진 자체가 그 유명세에 비해 너무 알려진 바가 없다.
1)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