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선한 사람
우준은 길을 걷고 있었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시골길이었다. 멀리 띄엄띄엄 농가 주택이 있고, 여기저기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밭담 안에 넓게 펼쳐진 짙푸른 작물들은 바람 따라 한가롭게 살랑였다. 밭에 일하는 주민은 보이지 않았다. 눈부신 오전 햇볕만 가득했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평화로움이 나른하게 펼쳐진 곳이었다.
우준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찾았다. 맞은편에서 선량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우준의 눈빛이 반가움으로 반짝 빛났다. 남자는 의아할 만큼 성급한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중년과 노년 사이 나이대 정도로 지긋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새마을 로고가 박힌 녹색 모자를 쓰고,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다. 장화 밑창 둘레엔 메마른 진흙이 더덕더덕 달라붙어 있었다. 손에는 낫 한 자루가 쥐여져 있었다. 누가 봐도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한 날이 바짝 선 새 낫이었다. 우준은 빠르게 그에게 걸어갔다. 그 또한 우준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겨왔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우준의 눈을 뚫어지게 똑바로 쳐다봤다. 마치 그는 오래전부터 우준을 목표로 걸어온 사람 같았다. 남자가 쥐고 있는 그 위협적이 낫이 햇볕에 반사되어 번득 빛났다. 기분이 어딘가 께름찍해진 우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남자를 회피했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일변했다. 남자는 우준의 심리를 읽어내고 불만이라도 생긴 것마냥 얼굴을 찌그러뜨렸다. 우준은 남자의 바뀐 표정을 못 본 척 외면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멀찍이 다른 뭔가에 시선이 팔려 있는 척 어설픈 시늉을 했다. 눈길이 향한 쪽으론 멀리 야산을 배경으로 그 동네에 흔하디 흔한 밭이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남자는 한 발 한 발 우준에게 가까워질수록 더더욱 무섭게 인상을 썼다.
당황한 우준은 걷는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졌다. 걸음이 도가 지나치게 빨라졌다. 막 지나치는 찰나 남자가 갑자기 우준의 팔을 불끈 움켜잡았다. 땀으로 흥건한 우준의 얼굴에 피가 솟구쳐 안색이 벌게졌다. 남자가 움켜쥔 팔을 홱 잡아끌었다. 우준은 억지로 입가에 선한 미소를 꾸며 지었다. 약자의 미소를 목격한 남자는 한층 더 불량스럽게 인상을 썼다.
“너 이 새끼 지금 어딜 가는 거야!”
우준은 자신을 이리저리 끌어당기는 남자의 철근 같은 완력에 휘청휘청했다. 살기등등한 눈을 부라리며 그는 손에 쥔 낫으로 우준의 머리를 찍어 버릴 것처럼 높이 치켜들어 올렸다.
“도망을 쳐? 어? 뒈지려고 아주 환장을 해 버렸냐?”
당혹스러움과 무서움 속에서도 우준은 예의를 지키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준의 목청은 자기도 모르게 싸우는 사람처럼 날카롭게 드높아져 있었다. 남자를 자극하기 딱 좋은 톤이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뭐? 왜 이러냐고? 몰라서 물어?”
남자가 험악하게 도끼눈을 치떴다.
“이 놈이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려고….”
“저기 아저씨 이 손 좀 놓고 얘기하세요.” 우준의 목소리가 떨리며 나왔다. 팔을 꽉 짓누르는 남자의 손을 떼놓으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라, 이놈이….” 움켜쥔 남자의 손아귀 힘이 되려 더 거세졌다.
“저기 아저씨… 제발 이 손을 좀 놓고….”
남자는 손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니가 내 통장을 훔쳐간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도통 알 수 없는 소리에 우준은 어리둥절해했다. “통장이라뇨?” “이 자식이 발뺌을 하네.”
우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도둑노무 새끼, 너 제 발 저려서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잖아!”
“아니, 아저씨 무슨 소리 하세요? 전 그냥 이 동네서 길 잃어서 나가는 길 물어보려고 사람 찾던 거뿐인데….” 우준이 억울해했다.
“이 새끼가. 거짓말 칠래?” 남자는 쉴 틈 없이 우준을 질타했다.
“저기, 아저씨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는 이 동네에 처음 온 사람이에요.” 죄라도 진 것처럼 비굴한 표정으로 우준은 이해를 구했다.
“그러니까 처음 온 새끼가 왜 통장을 훔쳐가 인마?”
“제가 무슨 아저씨 통장을 훔쳐갔다고 그러세요? 통장 같은 거 훔쳐다가 얻다 써먹을 데 있다고…그런 걸 제가 왜 훔쳐요, 예?”
“그걸 말이라고 해? 써먹을 데가 없는데 왜 훔쳐가 인마!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 훔쳐간 거 아니야, 인마!”
남자는 목소리를 빽 높여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로 우준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멱살을 거칠게 틀어잡아 마구잡이로 흔들어댔다. 그는 젊은 우준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악력은 우준에 비할 바 없이 억셌다. 우준은 남자가 흔드는 대로 속절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너 나하고 경찰서 가야겠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우준이 고함을 쳤다. 하지만 목소리가 여전히 떨려서 나오고 있었다.
“이 놈이 어디서 큰 소리를 쳐!”
남자가 낫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우준은 두려우면서도 어디 찌를 테면 찔러봐라라는 식으로 두 눈에 힘을 주고 기싸움하며 낫을 치켜든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맞봤다.
“일단 경찰서 가 보면 알 테지.” 남자는 동물을 끌어가듯 우준을 질질 끌어갔다.
우준은 자신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는 남자의 손목 부분을 세게 내리쳐서 멱살잡이를 한 번에 풀어냈다. 셔츠 목이 걸레처럼 형편없이 늘어나 있었다. 핏줄 서린 눈으로 남자는 우준을 죽일 듯이 뚫어지게 노려보고는, 도둑놈을 놓칠세라 또다시 멱살을 우악스레 틀어잡았다. 우준은 한 번 더 남자의 손목을 강하게 내려친 뒤 남자를 밀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갑시다, 경찰서. 가자고요! 가면 될 것 아닙니까!”
남자는 멱살 잡는 것은 그만두고 속마음을 꿰뚫어 읽겠다는 듯 우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세상 모든 악한 음흉함이 압축되어 있는 소름 끼치는 눈빛이었다. 남자는 낮게 목소리를 깔고 천천히 엄포를 놓았다.
“도망치면 너, 낫으로 찍어 버린다.”
*
우준은 두근거리면서도 고집스럽게 따라 걸었다. 일단 경찰서만 가면 이 경솔한 남자에게 온갖 면박을 퍼부어 주겠다고 우준은 단단히 다짐했다. 남자는 간간이 인상을 찌푸려 우준에게 빨리 걸으라고 무언의 재촉을 했다. 걸을수록 촌 동네는 더더욱 조용해지기만 했다. 아스팔트 대로가 나와야 치안센터라도 있을 텐데 가면 갈수록 마을은 더 궁벽해졌다. 주민들은 여전히 없었다. 태연한 척하는 우준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맞은편에서 허름한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햇볕에 검게 탄 얼굴에 연륜 있는 인자함이 가득한 이었다. 도움을 구하는 눈길로 우준은 밀짚모자 남자를 간절히 바라봤다. 밀짚모자 남자는 우준과 가까워지자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띄웠다.
우준을 흘끔흘끔 위아래로 살핀 밀짚모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박 씨, 어딜 가나?”
우준을 끌고 가는 남자의 성은 박 씨였다. 밀짚모자와 박 씨는 이미 서로 아는 사이였다.
“통장이 사라졌어.” 박 씨가 밀짚모자에게 대답했다.
“통장이?”
밀짚모자의 표정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큰일이구먼. 어떡하려고 그래?” 대사를 치는 신인 배우마냥 밀짚모자가 건조하게 물었다.
박 씨는 우준과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사람 좋은 말투로 붙임성 있게 밀짚모자에게 대꾸했다. “대신 통장을 훔쳐간 이놈을 잡았어.”
밀짚모자가 우준에게 시선을 홱 돌렸다. 그의 눈 속에 짙은 경멸감이 스쳐 지나갔다. 입을 꾹 다물고, 제 딴의 무서운 표정을 지어 우준을 노려보다가 못 참겠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러면 안 되지, 젊은 사람이!”
갑자기 꼬장꼬장해진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리고, 일부로 우준의 귀에 다 들리도록 혼잣말을 했다.
“요새 젊은것들은 왜 이런 건지 모르겠어. 말세가 된 건가….” 그는 잠깐 중얼거림을 멈췄다가 핏대를 세웠다. “부모들이 문제야, 부모들이. 아니, 자식 교육을 어떻게들 시키는 건지….”
밀짚모자는 작정한 목소리로 어른의 권위를 실어 호통 쳤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살면 못써!”
예기치 못한 고약한 훈계질에 기가 막혀 우준은 빙충맞게 어버버거리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밀짚모자는 우준이 스스로를 변호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자리를 떠 제 갈 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리를 뜨면서도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라는 악담을 남겼다.
우준은 영혼이 몸에서 이탈하여 그냥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박 씨가 등을 밀자 걷는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자동으로 발을 옮겼다.
“저기요, 경찰서가 있긴 한 겁니까, 예에?” 버럭 짜증을 내 우준은 억울함과 분함으로 맺힌 울화를 풀었다.
박 씨가 힘이 들어간 눈을 치켜뜨며 잡아먹을 듯 말을 받았다.
“도둑놈이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어!” 그는 손에 쥔 낫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한갓진 곳으로만 들어가니까 그러죠.” 박 씨의 기세에 기가 꺾인 우준이 한 수 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박 씨는 우준이 꼬랑지 내린 것을 보고는 인상을 풀고, 안심시키듯 다소 부드럽게 얘기했다. “군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 이제 다 왔으니까.”
그 뒤로도 한참을 함께 걷다가 박 씨는 능글맞게 웃으며 우준을 세웠다.
“다 왔어, 이 썩을 놈아.”
*
그들 앞에는 오랜 기간 방치돼 온 이층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빛바랜 페인트가 벗겨져 군데군데 콘크리트가 드러난 건물이었다. 건물 마당에는 잡풀들이 지저분하게 무성했고 마당 구석탱이엔 풍파에 찌든 목재나 녹슨 철재 폐기물 등이 어수선하게 엉켜 쌓여 있었다. 그 곁에 폐차가 한 대 버려져 있었다. 위 뚜껑 전체가 통째로 훼손되어 사라진, 좌석이 노출된 흰색 세단이었는데 차 측면에 빨간 락카로 SEXY라는 글자가 조잡시럽게 휘갈겨져 있었다.
우준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박 씨의 억센 손은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마치 사자가 영양을 물고 안 놔주듯이 말이다.
“왜 그래?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 거 같애?”
“저게 무슨 경찰서예요?” 우준은 박 씨의 손을 뿌리치려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이런 썩을. 의심은 많아가지고. 일단 따라와 봐. 따라와 보면 알 거 아냐. 따라와 보지도 않고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박 씨는 네가 왜 그러는지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투로 제법 사근사근하게 말을 맺고 나서, 자신을 믿으라는 뜻으로 우준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건물 이층 창문으로 누군가가 머리통을 쑤욱 내밀었다. 순박해 보이는 시골 청년이 우준과 박 씨를 탐탁잖게 내려다보다가 한순간에 표정을 싹 바꿔 잇몸을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악의적인 의도는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분 더러운 미소였다. 청년의 머리통은 창문 안으로 도로 쏘옥 들어갔다. 계단 통로에 발걸음 소리가 텅텅 울리더니 이내 입구에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양팔을 잘라낸 검은 민소매티에 물 빠진 진을 입고, 해변에서 어울릴만한 주황색 조리를 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양아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였다.
“아저씨 오셨어요?”
“오냐, 김사장 계시냐?” 박 씨는 ‘오냐’ 하고 대답할 때 ‘오’ 자를 길게 빼며 거들먹거렸다.
청년은 보이는 외양과 달리 몹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네, 목욕 중이세요.”
박 씨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만날 여자도 없는 디 무신 모욕이냐.”
“그러게요.” 청년은 비위를 맞춰 입가에 호의적인 미소를 짓고 의례적인 동의를 했다.
박 씨는 우준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앞장 세워 건물 안 층계로 들어섰다. 층계 통로를 통해 위층에서 희미한 뽕짝 소리가 들려왔다. 박 씨와 우준은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곧 우준의 눈앞에 인테리어가 되지 않은 삭막한 공간이 싸구려 뽕짝과 함께 펼쳐졌다.
“어이, 김사장 잘 지내셨는가?”
공간 구석쯤에 벽 없는 휑하게 트인 욕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 씨와 얼추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가 알몸으로 욕조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는 자두 색깔의 고급 욕조 테두리에 두 팔을 걸치고 뽕짝에 맞춰 흥얼 흥얼거렸다. 늙수그레한 나이에 비해 아직 젊은 기운이 팔팔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사장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풍채 또한 좋았다.
“김사장, 팔자 좋네!”
욕조에 앉아 있던 김사장이라는 작자가 콧노래를 뚝 멈췄다. 그는 박 씨를 잠깐 동안 무뚝뚝하게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박 씨는 김사장의 아랫도리를 보고 낄낄 웃었다.
“지금 그 연장으로 날 유혹하는 거여, 뭐여? 우리 사이에.”
박 씨의 농이 무색하게시리 김사장은 입꼬리 한쪽을 시니컬하게 올렸다. 그는 욕조에서 나와 벽걸이에 걸어놨던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수건을 도로 걸어놓은 뒤 가운을 걸쳤다.
박 씨는 창가에 위치한 테이블 쪽으로 우준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의자를 당겨 우준에게 앉으라고 턱짓을 했다. 매우 위압적인 태도였다. 테이블 위에는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올려져 있었고 그 곁에 부탄가스 한 묶음이 세워져 있었다. 김사장이 슬리퍼를 착착 소리 나게 끌며 다가와 맞은편 의자에 삐딱하게 앉았다.
“왜 온 거냐?” 김사장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왜 오긴? 김사장 섭하네….”
김사장은 비웃음을 흘렸다. “돈은 가져왔냐?”
박 씨가 되물었다. “돈?”
“빈손이지?” 김사장은 박 씨를 얕잡아보는 조였다.
“김사장 내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 박 씨의 얼굴에 굴종적인 미소가 번졌다.
“또 무슨 아이디어?” 김사장이 썩소로 받았다.
“내가 오다가 길에서 야를 주웠어.” 박 씨가 손짓으로 건성 우준을 가리켰다.
자신을 길에서 주웠다는 말에, 우준은 엉덩이를 걸치고 있으나 마나 한 의자를 우당탕탕 뒤로 넘어뜨리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우준의 옷자락을 잽싸게 낚아챈 박 씨는 불끈 힘을 줘 잡아당기고는 우준의 머리와 얼굴을 마구잡이로 구타했다.
“이 개노무새끼.” 박 씨의 난타질은 계속됐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가만히 듣질 않고 어딜 도망칠려고 해! 배워먹지 못한 노무새끼.”
우준은 얼굴이 얼얼했다. 박 씨는 허세 가득한 목청으로 청년을 불렀다. “야, 동건아.”
이름이 동건인 아까 그 청년은 팔짱을 끼고 한쪽 벽에 기대서서 무심하게 박 씨가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자슥 묶어놓을 거 없냐. 좀 묶어 놔라. 애새끼가 얌전히 있지를 않아. 요즘 애새끼들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처먹냐. 어른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이지. 맞지 않고 커서 그래. 전두환 시절처럼 처맞으면서 커야는데….”
동건은 별 반응 없이 그대로 있더니 벽에서 몸을 떼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온 동건의 손엔 묶기에 적당한 로프가 쥐어져 있었다. 동건은 로프를 흔들며 박 씨에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흘끗 로프를 확인한 박 씨는 동건에게 만족의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는, 다시 대단한 상의거리라도 있는 양 진지하게 김사장에게 주절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짜 좋은 생각이 있어. 그리고 김사장, 나 절대 김사장 돈 거저먹지 않아. 내가 쪼잔시럽게시리… 아니, 거… 뭐 몇 푼이나 된다고….” 박 씨는 갑자기 언짢아졌는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가 김사장을 의식하고는 얼른 주름을 펴 접대 웃음을 지었다. “일단 얘 팔고….”
그때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온 동건이 박 씨의 목을 로프로 홱 걸어 졸랐다.
“아이 씨발, 아버지 죄송해요. 나 정말 이 새끼 말 많아서 싫어요.” 동건이 광기 어린 힘을 발휘하여 목을 조였다.
박 씨가 로프를 풀려고 파닥파닥 용을 쓰며 발버둥을 쳤다. 목이 메어 캑캑 거리는 소리가 끔찍하게 울렸다. 의자에 앉은 채로 그는 요란스럽게 넘어가 바닥에 부딪치며 쓰러졌다.
김사장이 아들 말에 가타부타 대꾸 없이 우준 쪽을 바라봤다. 우준은 어찌할 바 모르고 있다가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갔다. 어지러운 발소리가 계단 통로에 시끄럽게 울렸다. 건물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우준은 왔던 길로 내달렸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
한참을 도망치다가 이내 지쳐버린 우준은 허리를 숙이고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무릎을 짚은 채 헉헉거리며, 따라오는 사람은 없는지 수차례 뒤를 확인했다. 겨우 숨을 돌릴 만하다 싶을 즈음 록음악이 섞인 소음이 우준의 귀에 감지됐다. 멀리서 차 한 대가 우준이 쉬고 있는 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가만히 봤더니 건물 근처 쓰레기들과 함께 방치돼 있던 바로 그 폐차였다. 폐차가 우준 쪽으로 속도를 높여 오고 있었다. 우준은 벌떡 몸을 일으켜 다시 죽어라 내달리기 시작했지만 모든 게 허사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속도의 차이 때문에 곧 폐차에 따라 잡힐 것이 분명했다.
공기를 찢는 위협적인 록음악은 등 뒤에서 점차 커졌다. 클락션 소리가 서라는 의미로 빵빵거렸다. 우준은 차에서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달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제자리에 허리를 숙이고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허파가 터져 버릴 것 같았고 입안에 비릿한 쇠 맛이 맴돌았다. 우준을 따라잡은 동건은 차를 세웠다. 숨을 몰아쉬는 우준을 동건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정신 사나운 록 음악을 끄고 동건은 우준에게 물었다.
“왜 그래? 재미없게시리. 벌써 포기한 거야? 이제 도망 안 가? 더 도망갔으면 좋겠는데….”
우준은 마땅히 대답할 말도 없고 설사 대답을 하고 싶어도 숨이 너무 찼으므로 헉헉거리기만 했다.
“끈기가 약하네, 끈기가. 벌써 지친 거냐?”
동건의 물음에 갑자기 울컥한 우준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그리곤 다시 헉헉거렸다.
동건은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것 마냥 잠잠히 있다가 불쑥 물었다. “뭘?”
“왜 저를 쫓아오냐고요? 저는 잘못한 것도 없고…” 우준은 숨을 두세 번 몰아쉬고 이어서 말했다. “아까 그 박 씨라는 남자와 저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요.” 점차 우준의 벅찬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저는 이 동네에 오늘 처음 왔단 말예요.”
그는 생각할수록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여행 왔다가 길을 잃고 이게 무슨 개 같은 고생인가. 왜 이 사람들은 나를 좇아오는가. 대상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깊은 원망이 들었다.
“박 씨와 관계가 없다니? 너 박 씨와 우리 집에 왔잖아. 우리가 초대해서 온 것도 아니고. 안 그래?” 동건이 물었다.
“하….” 우준은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전 그냥 걷는데 그 사람이 절 낫으로 위협해서 할 수 없이 끌려간 거뿐이에요. 낫 때문에 무서워서 할 수 없이…”우준은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동건이 머릿속으로 손익을 셈하듯 가만히 우준을 바라봤다. 그는 차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손에는 낫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거?”
우준은 흠칫 놀랬다. 입이 딱 얼어붙었다. 동건은 자기가 들고 있던 낫을 콘크리트 길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은 뒤 우준을 바라보며 뒷걸음질 쳤다. 우준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낫과 동건을 번갈아보다가 그는 잽싸게 달려들어 낫자루를 주워 들었다. 낫을 치켜들고 그는 동건에게 악을 썼다.
“가까이오지 마아!”
“동건이 예의 무심한 눈빛으로 멀거니 우준을 봤다. “왜 걸로 날 찌르기라도 할려고?”
우준은 속에 갖고 있던 악독함을 모조리 내질렀다. “몰라, 씨발. 가까이 오지 마!”
동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 씨에게 붙잡힌 너를 자유롭게 해 준 사람이 나 같은데… 너는 걸로 나를 찌르시겠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우준은 더 이상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위협을 멈추고 한 발 한 발 뒷걸음질을 쳤다. 어차피 그에겐 낫으로 누군가를 찌를 용기도 없었다. 뒷걸음질 치던 우준은 얼른 몸을 돌려 내달렸다. 다리 힘이 풀릴 정도로 미친 듯이 달렸다.
다행히 폐차는 좇아오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뒤를 몇 번 흘끔거린 후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밀려오는 안도감으로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때쯤이었다. 다시 등 뒤에서 록음악이 시끄럽게 들려 왔다. 폐차는 허무할 만큼 순식간에 우준을 따라잡았다. 속도를 줄인 폐차는 정지하지 않고 서행하다가 그대로 우준을 들이받았다. 윽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우준은 앞으로 쓰러졌다. 세게 받히진 않았지만 그는 뼈마디 하나가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차 문 여닫는 소리가 탁 울렸다. 차에서 내린 동건이 바닥에 엎어져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는 우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낫을 손쉽게 수거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냉혈하게 우준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자리에 쪼그려 앉아 우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난 너 같은 놈이 제일 싫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
*
동건은 우준을 차에 태우고 록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며 어딘가로 차를 몰았다. 옆자리 조수석에 짐더미처럼 얹혀진 우준은 청테이프로 손발이 꽁꽁 묶인 상태였다. 입 또한 청테이프로 봉해졌다. 고통스러운 우준은 가끔 끙끙 신음 소리를 냈지만 동건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사냥물의 생사를 확인하듯 흘끔거리곤 즐겁게 흥얼거릴 뿐이었다.
폐차는 얼마 없어 어느 슬레이트 가옥에 도달했다. 널찍한 앞마당에 차양이 넓은 파라솔이 있었다. 그 파라솔 그늘 아래에 남자 두 명이 각기 접이식 간이침대에 팔자 좋게 늘어져 있었다. 멀대처럼 키가 큰 남자는 웃통을 훌러덩 깐 채 누워 있었고 머리가 더벅진 다른 남자는 누릿하게 변색된 흰색 런닝 차림으로 있었다. 그들은 동건이 폐차를 몰고 곧바로 돌진해 오자, 저 차가 설마 우리를 덮치기야 할까 설마 그럴 리 없다는 시선으로 ‘어? 어?’ 하며 놀라기만 하다가, 차에 아주 치일쯤이 돼서야 날쌔게 간이침대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일촉즉발의 위험한 순간이었다. 폐차는 침대 바로 앞에 아슬아슬하게 딱 밀착해서 멈춰 섰다. 동건이 차 문을 일부러 센 소리 나게 탁 닫으며 내렸다.
“뭘 그리 놀라냐, 씨발럼들아.” 그는 재미있어하며 낄낄거렸다.
혼비백산하여 몸을 날려 바닥을 굴렀던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똑같이 쌍욕으로 맞섰다. “야 이 씨발아, 미쳤냐 미쳤어?”
그들은 간 떨어질 뻔했네 어쨌네 궁시렁궁시렁 하더니 툭툭 몸을 터는 체 마는 체 도로 간이침대에 드러누웠다.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안락한 표정으로 돌아가던 그들은 불현듯 생각났는지 발치에 바짝 붙여 세운 폐차를 쾅쾅 발로 차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야, 똥차 안 치우냐. 씨발아!”
동건이 능글능글 웃으며 차를 빼 주자 그들은 이전의 안온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팔을 베고 나른하게 늘어진 폼들이 세상 이렇게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없다는 모습들이었다. 그들의 관심 안에 동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폐차 조수석에 있는 우준을 발견한 멀대가 그제야 약간의 관심을 보였다. “쟨 누구냐?”
더벅머리가 따라쟁이처럼 반복적인 질문을 했다. “그러게. 쟨 누구냐?” 묻고 나서, 더벅머리는 킁 하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나사 하나 풀린 사람마냥 의미 없는 웃음을 히죽히죽 흘렸다.
동건이 한번 우준을 돌아봤다. “쟤?” 막 말문을 여는데 더벅머리가 잽싸게 동건의 대답을 가로챘다.
“새로 사귄 찐따 친구냐? 킁.” 기막히게 재치 있는 농담을 던졌다고 생각하는지 더벅머리는 저 혼자 흡족해서 낄낄거렸다.
동건은 더벅머리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아예 무시해 버리고, 대화 상대를 멀대로 한정해 설명했다. “은혜 모르는 놈.”
“은혜 모르는 놈?” 노곤함에 겨운 멀대의 눈에 다소 호기심 어린 빛이 켜지고, 더벅머리가 둘 사이를 양양한 톤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은혜 모르는 놈은 죽여야지, 니 애비라고 차에 모시고 다니냐, 응? 킁.”
동건은 가옥 외벽에 아무렇게나 기대 놓은 낡은 철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걸터앉았다. “저 놈이 그래도 이 형님 거다.”
“니 꺼?” 멀대가 되물었다.
“오야, 내 꺼.”
멀대는 삭신이 쑤시는 노인처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우준을 요모조모 뜯어봤다. 그러고는 만사 귀찮은 낯으로 털썩 도로 드러누웠다. “그 새 게이가 돼 버렸나…?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멀대의 웅얼거림을 끊고 동건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야, 박 씨 새끼 있잖아…” 동건은 뜸을 들여 멀대와 더벅머리를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근데 그 새끼 존나 웃겨. 질질 울어 싸면서 지가 저 새끼를 사냥해 왔다는 거야, 씨발. 그러면서 돈 대신 저 놈으로 갚겠대.” 말을 마친 동건은 입가에 알 듯 모를듯한 냉소를 머금었다.
“박 씨한테 돈 빌려준 적 있냐?” 멀대가 혀를 쯧쯧 찼다. “그래서 내가 뭐랬냐. 박 씨는 반쯤 죽여 놔야 우리 마을이 좀 조용해진다니까.” 그는 입을 크게 쩌억 벌려 무료함에 겨운 기지개를 켰다.
“씨발, 근데 일이 좀 이상하게 꼬였다.” 동건이 투덜댔다. “아니, 목 좀 졸랐다고 쓰러지길래, 그 새끼 불알을 씨게 찼거든. 아닌 근데 내 킥이 그렇게 센가?” 그는 조리를 신은 자신의 두 발을 새삼스레 내려다봤다. “이 새끼가 갑자기 얼굴이 시퍼레지더니 죽어 버리잖아. 씨발, 그게 죽을 일이냐? 아니, 다리를 바르르 떨더라고, 무슨 메뚜기처럼.”
멀대와 더벅머리는 간만에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들처럼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죽어? 뒈져 버렸다고?”
“어, 이 새끼가…한 대 맞더니 뒈져 버렸어.”
농담이 아닐 수도 있음을 느낀 멀대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정말?”
“어, 정말.” 동건은 무덤덤했다.
멀대와 더벅머리는 지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내려고 촉을 세웠다. 동건의 표정에서 장난이 아닌 실제 상황임을 알아차린 그들은 되려 가슴까지 들썩이며 더 크게 웃어제꼈다.
“야, 차 안에 박 씨 있다.”
멀대와 더벅머리가 멈칫 서로를 바라보더니 곧 후다닥 일어나 차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우준을 보는 둥 마는 둥 눈길 한 번 안 주고, 뒷좌석을 확인한 후 또다시 한바탕 호쾌하게 웃어제꼈다. 뒷좌석 바닥에 박 씨가 널브러져 있었다.
“야, 이거 진짜 뒈진 거 맞아?” 멀대가 신이 나서 고함쳤다.
“어, 그래.”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동건이 심드렁하게 응답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득의가 만만했다.
“진짜지?”
“진짜지 그럼 내가 거짓말하겠냐?” 동건이 짐짓 귀찮아했다.
구경을 끝낸 멀대와 더벅머리는 여전히 웃음꽃을 피운 채 간이침대로 돌아와 편한 자세로 드러누웠다.
“아 놔, 박 씨 새끼 인생 허무하게 가버리네.” 멀대가 감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어조로 지껄였다.
“뭐, 인생이 다 그런 거지, 킁.” 더벅머리가 아는 체했다.
“근대…”멀대가 의아한 점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뭔가 불길한 사실을 간파했는지 미간을 성마르게 좁혔다. “근데 뒈진 놈을 왜 여기 데려온 거냐?”
“그러게. 뒈진 놈을 왜 데려온 거야, 킁.” 더벅머리가 호응했다. “시체 썩으면 냄새나잖아. 나 시체 냄새 내 옷에 배는 거 진짜 싫은데. 킁.” 더벅머리는 자기 런닝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빨지 않은 런닝에서 찌든 땀내가 꼬릿 하게 코를 찔러 그는 얼굴을 피하며 찡그렸다.
동건이 뻔뻔스럽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왜 데려오긴 왜 데려왔겠냐. 같이 파묻어야지.”
멀대와 더벅머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노의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아놔, 이 씨발새끼.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냐?”
“혼자 묻어 새끼야, 킁. 우리가 니 시다바리냐? 응? 니 똥 닦아주는 시다바리냐고? 응? 킁. 난 니 시다바리 아닌데? 킁.”
그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격앙되어 으르렁거렸다.
“가자, 좆밥들아.” 동건이 자신의 허벅다리를 두 손으로 착 내리치며 단호하게 일어섰다. 그러자 멀대와 더벅머리가 투덜투덜 입속말로 불평을 하면서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비포장 길에 차를 세우고 동건 일당은 그 길가에서 삽질을 했다. 어느덧 대강 구덩이 꼴이 갖춰졌다. 그들은 축 늘어진 박 씨를 폐차에서 끌어내려, 땅바닥에 질질 끌어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처박았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박 씨 몸뚱아리 위로 흙이 한 삽씩 떠 넘겨졌다.
“박 씨 이 새끼 우리 어릴 때 존나 무서웠는데, 킁.” 더벅머리가 흙을 푹 퍼서 박 씨 얼굴에 뿌리며 중얼거렸다.
멀대가 갑자기 삽질을 멈췄다. “우리 어릴 때 이 새끼한테 누구 처맞은 놈 있지 않았냐?” 멀대는 옛 생각을 더듬느라 허리를 펴고 잠시 골똘해졌다. “옛날에 이 새끼 밭에 들어갔다가 작물 망쳤다고 뒤지게 처맞은 놈이 누구였냐? 서울 간 승민이냐?”
“동건이지, 그것도 모르냐? 킁.” 더벅머리가 기억력을 뽐내려고 잽싸게 멀대에게 핀잔을 준 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멀대는 등을 돌려 더벅머리를 무시해 버리고 동건 쪽을 향했다. 그는 ‘오-’하고 탄성을 냈다. 삽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셋 중에서 가장 건성건성 일 하던 동건은 혼자 폐차에 기대 쉬고 있는 중이었다.
“오, 동건. 복수했네, 아주 시원하게.” 멀대의 말에 동건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배우라도 되는 양 어깨를 으쓱했다.
더벅머리가 죽은 박 씨에게 흙 한 삽을 떠 넘기며 충고를 했다. “그러니까 박 씨,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알았어? 킁.” 그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내 말이 맞지 않냐? 씨이발, 킁.”
다시 몇 삽 뜨던 멀대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가만. 근데 지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냐?”
“무슨 소리? 니 애비 씹하는 소리? 킁.” 더벅머리는 자기가 생각해 낸 기발한 농담을 남에게 가로채일까 조바심이 나서 황급히 내뱉었다. 그러고는 뿌듯해서 낄낄거렸다.
“야, 삽질 멈춰 봐.” 멀대가 더벅머리의 동작을 멈추게 하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왜 그러냐, 씨발. 킁.” 더벅머리가 투덜거렸다.
고요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멀대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일이 잘못된 것을 감지했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계속해서 뭔가를 듣기 위해 세심하게 집중했다. 마침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소곤댔다. “것 봐, 들리지?”
“들리긴 뭐가 들리냐 븅신아, 킁. 이 새낀 존나 예민해.” 더벅머리가 사정을 못하고 관계를 끝낸 사람처럼 짜증을 냈다.
“들어봐 봐, 븅신아.”
“뭘 들어, 븅신아, 킁.”
멀대와 더벅머리가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동건이 문득 심각한 얼굴을 하고 손을 들어 둘을 제지했다. 멀대 말대로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손짓이었다. 진지한 폼으로 긴장된 분위기를 한껏 조성한 그는 똑같이 진지해진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기다렸다는 듯 요란스럽게 방귀를 꼈다.
“에이, 씨발 초딩이나 하는 유치한 짓을…킁.”
멀대와 더벅머리는 쓸데없이 경직됐던 자세를 풀고 투덜댔다.
“빨리 삽질해, 븅신들아. 하루 종일 할 거냐?” 정작 자기는 쉬면서 동건은 뻔뻔스럽게 큰소리쳤다.
“야, 씨발 너가 해. 킁” 더벅머리가 동건의 발치에 삽을 내던지며 불만을 표시했다.
동건은 삽을 집어 들고 성큼성큼 다가가, 푹푹 흙을 떠서 구덩이에 휙휙 뿌렸다. 그때 난데없이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대와 동건이 동작을 멈추고 커다래진 눈으로 서로를 맞바라봤다. 박 씨를 파묻은 땅이 지진이 난 것처럼 꿀렁거리고 있었다.
동건이 급하게 외쳤다. “야, 흙 다져, 씨발. 시체 움직인다.”
더벅머리의 얼굴이 공포로 굳어졌다. “뭐야, 그새 좀비가 된 거냐? 킁킁킁킁.” 더벅머리의 킁킁거리는 소리가 위험을 만난 비상벨처럼 거세졌다. 그는 꿀렁거리는 땅을 인정사정없이 거세게 꽝꽝 밟기 시작했다. “이 좀비 새끼, 뒈져라. 좀비 새끼. 킁킁.” 땅을 뚫고 일어나는 죽은 시체 때문에 시퍼렇게 겁에 질려 그는 온 힘을 다해 땅을 짓밟았다.
멀대와 동건이 가세해 서둘러 땅을 쿵쿵 짓밟았다.
어설프게 덮은 흙을 헤치고 드디어 박 씨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동건, 멀대, 더벅머리는 다급해져 흙투성이 박 씨의 머리통을 더 잔인하게 밟았다. “악, 악! 뒈져, 좀비 새끼! 뒈져!” 독기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그들은 박 씨를 땅 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사투를 벌였다. 송장이 돼 버린 박 씨도 안간힘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박 씨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더벅머리의 다리 한쪽을 부둥켜안고 철거머리처럼 놔주지 않았다.
“왜, 나야 씨발. 킁” 모지락스러운 발길질로 박 씨를 떼어내던 더벅머리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팔을 내저으며 볼썽사납게 거꾸러졌다. 박 씨는 쓰러진 더벅머리의 몸뚱이를 악착같이 잡아당겨 기어이 흙 속에서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동건이 더러운 꼴을 봤다는 듯 캬악 가래를 끌어올려 퉤 뱉었다. 그는 삽을 내팽개쳤다. “에이 씨발, 야, 둬, 둬, 둬! 질기다 질겨. 씨발 징해, 아주 징해.” 그는 박 씨의 흙투성이 손을 붙잡더니 힘을 줘 끌어당겼다. 박 씨 몸이 흙속에서 쑤욱 딸려 나왔다. 멀대와 더벅머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동건을 바라봤다. 그들은 박 씨를 그냥 흙속에 매장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박 씨는 흙 범벅이 된 눈을 사정없이 비비며 “물! 물!”하고 외쳤다. 맛이 간 그의 쉰 목소리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박 씨는 흙과 피가 뒤섞인 끈적끈적한 침을 울궈내 뱉곤, 대략 십칠 년 치 정도 묵혀놓은 것 같은 숨을 씨익씩 급하게 내쉬었다.
동건이 느릿느릿 폐차에서 생수병을 갖다 줬다. 박 씨는 눈과 얼굴을 대충 씻어낸 후 입을 헹궈 와락 뱉어냈다. 더러운 흙이 눈물, 콧물, 생수에 뒤범벅돼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구정물이 얼굴 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거친 숨소리는 그치지 앉았다. 그는 다시 몇 차례 입을 헹궈내 뱉었다. 갈증을 느꼈는지 물 한 모금 넘기다가 사래에 걸려 폭발하듯 내뿜고, 목이 뽑힐 만큼 캑캑거렸다. 어수선한 박 씨의 모습을 지켜보던 동건이 얼굴에 후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
어느 정도 진정된 박 씨가 기죽은 목소리로 불평을 했다. 여전히 흙물을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동건아, 삼십만 원 안 줬다고 사람을 파묻는 건 너무 하지 않냐?” 고개를 숙이고 박 씨는 입 안에 씹히는 흙 알갱이를 튀튀 뱉어냈다. 행여 동건 일당이 불만의 표시로 오해할까 두려워 그는 최대한 소리를 낮춰 소심하게 뱉었다.
동건은 팔짱을 끼고 쌓인 게 많은 꿍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아저씨, 삼십만 원이면 안 줘도 돼요?”
“그럼 당연히 줘야지, 킁.” 더벅머리가 기계적으로 추임새를 넣었다가 “삼십만 원…? 킁.” 뇌까리고는 ‘너무 액수가 적은데?’ 하는 눈빛으로 동건을 바라봤다. 동건이 아무 반응을 안 해주자 더벅머리는 이내 태세를 전환했다. “큰돈이네, 큰돈. 킁.” 그는 오버스럽게 동건을 편들었다.
“아저씨는 나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가 고작 오만 원 안 갚는다고 밤에 존나 술 처먹고 와서 땡깡 부렸잖아. 생각 안 나요?” 동건의 말에, “맞아 박 씨 아저씨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지. 킁.” 더벅머리는 또 추임새를 넣었다.
“인마 그건!” 자기도 모르게 다혈질적으로 목청을 높였던 박 씨는 애써 목소리를 누그러트리고 조심히 말을 이어갔다. “그건 오만 원 때문이 아니라… 아니, 내가 무슨 오만 원 때문에… 내가 고작 그럴 사람이냐. 그건 오만 원 때문이 아니라… 그건 니 아부지가… 그때 우리 혜신이 몸에 오줌을 싸니까 그랬지!” 박 씨는 말을 하다 보니 문득 화가 치밀었는지 부지불식간 욱해서 말을 마쳤다.
“혜신이? 혜신이가 누구냐? 킁. 박 씨 이거? 킁.” 더벅머리가 멀대에게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박 씨네 똥개.” 멀대가 무심히 대꾸했다.
더벅머리는 수긍이 간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술 먹고 깽판 쳤다고 니네 아버진 우리 혜신이를… 잡아먹었어.” 그는 개가 불쌍했는지 아니면 현재 자신의 처지가 불쌍한 건지 처량하게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럼 누가 화낼 일이냐, 내가 더 화낼 일 아니냐?”
“것도 일리가 있네, 킁.” 더벅머리가 별생각 없이 맞장구를 쳤다.
수세에 몰린 동건은 아무 얘기도 못 들은 척 말머리를 돌렸다. “좌우지간 아저씨, 거 툭하면 동네 들어오는 사람들 납치하고 팔아넘기고, 씨발 아저씨 땜에 우리가 위험해.” 사이를 두고 동건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엄한 애 죽여갖고 것도 우리가 파묻고 말이야…. 그리고 또 저번에 납치했다가 자살한 애, 걔도 우리가 파묻었잖아. 안 그래요?”
“맞아, 걔 묻다가 난 걔가 싼 똥 손에 묻었잖아. 킁.” 더벅머리가 분개하며 손가락 냄새를 맡았다.
“씨발 아저씨 땜에 여기저기 다 시체투성이야.”
“그 덕에 나무들이 잘 자라잖냐. 숲이 존나 우거져. 킁.” 더벅머리가 꼬질꼬질한 자기 런닝에 손가락을 문질러 닦으며 비아냥댔다.
멀대가 목청을 흠흠 고르더니 점잖게 말을 보탰다. “아저씨, 거 뭐냐. 동건이 말이 맞아요. 우리 동네가 그래도 옛날에는 착한 동네였는데 아저씨가 사람 납치해서 팔아먹고, 행불 된 사람 찾으러 온 사람 대책 없이 죽여 버리고, 그렇게 납치해 팔아먹거나 죽인 사람이 지금 셀 수가 없어요.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고 아저씨가 시작한 일인데, 우리도 아저씨 파묻고 거 좀 조용하게 삽시다, 예?”
박 씨가 울화통을 터트렸다. “너네들도 그때마다 협조비다 뭐다 공돈 먹고 좋았잖아. 이 동네 사람치고 내 덕 안 본 놈 있어? 돈 나눠먹을 땐 헤헤거리더니 이제 일 커지고 귀찮아지니까 삼십만 원 핑계로 나를 처리하자? 그게 사람이 할 도리냐, 응? 나는 그래도 정직하게 사람 팔아먹고 돈 나눈 적은 있어도 배신 때린 적은…”
멀대가 길어지는 박 씨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는 폐차 안 우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재도 이 동네 누구 찾으러 온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할 거예요?”
그때까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박 씨는 멀대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제서야 그는 차 안에 있는 우준을 보게 됐다. 우준은 청테이프로 입을 봉한 채 얌전히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쟤 같은 애는 융통성 발휘해서 조용조용 팔아먹으면 나도 좋고 니들도 좋고, 우리 마을 경제도 살아나는데 그게 뭐 잘못이야! 세상에 썩어난 게 사람인데! 사람 좀 팔아먹고 죽인다고 세상 사람들이 무슨 큰 피해라도 입냐!”
박 씨의 역정에 멀대와 더벅머리가 새삼스레 우준을 빤히 봤다. 동건도 따라서 우준을 바라봤다. 멀대가 쩝 입을 다셨다. “하긴 죽이긴 아깝고 어디 팔아먹으면 좋긴 한데.”
“그러게. 킁.” 더벅머리가 호응했다. “근데 판로는 박 씨 아저씨만 알잖아. 그럼 뭐야. 박 씨 또 살려줘야 하는 거야? 킁.”
말귀를 알아들은 우준이 청테이프를 뚫고 복화술로 비명을 질렀다.
“조용해 새끼야!”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에 사로잡혀 있던 동건이 우준을 다그쳤다. 그는 친구들에게 향했다. “안 돼, 쟤는. 불씨를 남기면 안 돼. 이럴수록 마음을 합심해야 돼. 눈앞의 이익에 혹하면 안 돼. 쟤 이 마을 나가면…” 동건은 친구들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우리 다 뒈진다.”
멀대와 더벅머리는 동건의 결정이 내키지 않는지 꿍해서 대꾸를 안 했다.
*
동건 일당은 우선 박 씨와 우준을 살려두기로 하고 폐차에 그들을 태우고 다녔다. 가던 도중에 동네 어느 주택 앞에 차를 세웠다. 박 씨를 파묻으러 갈 때에도 삽을 챙기느라 들렀던 집이었다.
마침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주택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폐차가 서는 걸 보고 자리에 섰다. 우준이 박 씨에게 끌려가던 길에 우연히 마주쳤던 바로 그 밀짚모자 남자였다. 밀짚모자 남자는 차 안에 있는 박 씨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박 씨! 몰골이 왜 그래?”
밀짚모자는 동건 일당을 쭈욱 둘러봤다. 동건, 멀대, 더벅머리는 입을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밀짚모자는 동물 보듯 우준에게도 흘끗 눈길을 줬다. “박 씨, 쟤는 또 뭐야? 쟤 박 씨 통장 훔쳤다고 하지 않았어?” 박 씨와 우준이 같은 차 안에 있는 게 어색해 보였는지 밀짚모자는 둘을 몇 차례 번갈아 봤다.
기력이 빠진 박 씨는 밀짚모자의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왜 둘이 이제도 같이 있어? 이번엔 팔지 않을 거야? 죽이기로 한 거야?” 밀짚모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더벅머리가 급히 차에서 내려 밀짚모자의 손안에 삽자루들을 쥐여줬다. “아부지, 나 삽 드렸어요. 또 나보고 삽 잃었다고 화내시고 사랑의 매 들고 그러시면 안 돼요. 킁.”
제 할 말만 내던지고 냉큼 돌아서려는 더벅머리를 밀짚모자가 얼른 잡아 세웠다. 그는 음흉하고도 나지막한 음성으로 넌지시 건넸다. “야, 야. 쟤 판다더냐? 쟤 팔라믄 눈에 뭐, 바늘로 콕 찔러서 눈멀게 하고 귀에도 뭐 좀 부어서, 응, 좀 귀머거리 장님 만든 다음 팔던가 해. 우리 이러다 다 잡혀간다. 무서워. 요새 애들, 믿지 못해. 그냥 툭하면 경찰에 꼰질러. 옛날 같지 않게 아주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친구들에게 정신이 팔려 서둘러 폐차로 되돌아가려던 더벅머리는 적당히 둘러댔다. “아부지, 걱정 마세요. 제가 아무 문제없게 할 테니까, 킁.”
밀짚모자는 자기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리를 뜨려는 철부지 아들을 못 가게 붙잡고, 노파심이 가득 깃든 어투로 재차 당부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고. 저렇게 순진하고 착하게 생긴 애가 우리 다 죽인다. 저런 애들이 뒤통수 씨게 치고. 별것도 아닌 걸 폭로해서 남 못살게 굴고. 무서운 애야, 무서운 애. 난 마을에 들어오는 저런 낯선 애만 보면 무서워서 아주 잠을 못 잔다.”
더벅머리는 아버지의 충고가 길어지는 것을 지겨워하며 가로막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안심을 시켰다. “아부지, 걱정 붙들어 매시라니까요, 킁. 아부지 안 무섭게 제가 처리 잘할 테니. 킁.”
밀짚모자는 차 안으로 뛰어들어 점프해 앉는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 오늘 밤새도록 집에 안 들어오면 사랑의 매 때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알았어?”
더벅머리가 영혼 없이 크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일찍 올게요. 킁.”
그때 집 안에서 누군가가 황급하게 나왔다. “야, 야, 동건아. 동건아!” 보라색 고무슬리퍼를 신은 여인이 한 손에 검은 비닐봉다리를 들고, 차 세우라는 손짓을 보냈다. 차가 그대로 떠나 버릴까 애를 태우는 모습이 뚜렷했다.
동건은 막 출발시켰던 폐차를 세웠고, 더벅머리가 아버지를 상대하느라 꾹 누르고 있던 짜증을 폭발시켰다. “엄마는 또 왜? 킁.”
동건이 차 문을 강하게 탁 소리 내며 여닫고 나왔다. 그는 더벅머리의 엄마에게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를 했다.
“동건아, 어머니 병원 다니시는 거 요샌 어떠시냐?”
“많이 좋아지셨어요.” 동건은 여태 보이던 모습과는 백팔십도 다르게 청소년 만화 속 모범 인물에 빙의된 것처럼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니가 잘 보살펴 드려야지, 니네 엄마는 너 하나 믿고 사는데.”
“네 명심할게요, 어머니.”
“그리고 이건 내가 쑥떡 좀 쪄 봤는데 맛 좀 보시라고 해라. 먹을 만할 게다.” 더벅머리의 엄마가 동건에게 비닐봉다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엄마에게 봉석이 어머니께서 안부 묻더라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래.” 더벅머리의 엄마는 그만 가도 좋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은 더벅머리 엄마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폐차에 오르면서 부부를 향해 또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부는 마치 자기 자식이라도 배웅하는 양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새 애들 같지 않게 예의 바르고 착하기도 하지,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더벅머리 엄마는 바로 그 살가운 미소를 지우고 인상을 구기며, 폐차 꽁무니에 대고 외쳤다. “봉석이 너, 저녁에 빨리 들어와서 공부해! 놀지만 말고! 취업 준비는 언제 할 거야!”
폐차는 더벅머리의 집 마당을 벗어났다. 콘크리트길을 따라 달리는데, 우준이 입을 봉한 청테이프 틈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더벅머리가 텔레파시가 통한 것마냥 반색을 하며 들뜬 목소리로 호응했다. “나 불렀어? 킁.”
멀대가 때릴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더벅머리의 뒤통수를 한 대 세게 탁 때렸다. “쟤가 왜 너를 부르겠냐?”
“부를 수도 있잖아. 살려 달라 그럴 수도 있고. 또 누굴 찾으러 왔는지 알리고 싶어 할 수도 있고.” 더벅머리는 심히 삐져서 킁킁거리는 습관도 잊은 채 볼멘소리를 냈다.
“너한테 누굴 찾으러 왔는지 말하면 찾아줄 수는 있고?”
“박 씨한테 물어서 알아봐 줄 수도 있잖아, 킁.” 더벅머리의 얼굴이 기분 나쁜 기색으로 퉁퉁 굳었다. “이 새끼들은 가만 보면 나를 존나 무시해. 킁” 그 말을 끝으로 실없이 웃고 떠들던 더벅머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굳게 자기만의 다짐을 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그러지 말고 우리 건물에 가서 고기나 구워 먹자. 아까 삼겹살 구워 먹을까 했는데, 씨발 박 씨 와서 못 먹었잖아.” 동건이 제안했다.
“그래?” 멀대가 더벅머리의 기분을 조금도 파악 못하고 얼굴을 활짝 펴며 좋아라 했다. 멀대가 좋아하는 것을 본 더벅머리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더벅머리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동건은 두 친구가 동의한 것으로 단정 짓고 건물로 폐차를 몰았다.
*
그들은 박 씨와 우준을 몰아대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엔 아직도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놓여 있었다. 동건은 후라이팬을 가져와 가스레인지에 얹고, 냉장고에 넣어뒀던 삼겹살 그리고 냄새만 맡아도 침이 고이는 물씬 신 김치를 꺼내왔다.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기 시작하자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겼다. 그때껏 시큰둥하던 더벅머리가 코를 벌름거리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배시시 웃었다. 창문 밖으로는 짙푸른 숲과 밭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캬, 뷰 죽인다.” 멀대는 감탄을 하며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신 김치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아삭아삭 씹었다. “너네 아버지는 이젠 여기 까페 안 차린다더냐?”
“차릴 수가 있겠냐? 저 박 씨 땜에 동네 개판 돼서.” 동건은 멀찍이 바닥에 앉혀놓은 박 씨를 흘끔 건너다봤다. 청테이프로 팔다리를 튼튼히 묶어놔서 도망칠 엄두를 못 낼 것이라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박 씨 곁 우준은 허리 뒤로 묶인 팔목에 힘을 줘서 꾸준히 미세한 틈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동네에 외지인 들어오는 거 아부지도 싫어해, 이젠.” 동건은 노릇해진 고기를 뒤집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 가족 같잖아. 요샌 이런 동네도 없고. 당신은 돈 좀 덜 벌어도 뭐 이런 데서 평화롭게 사는 것만으로도… 아버진 이제 그런 쪽으로 좋게 생각하시고 만족하는 거 같애.” 후라이팬에 고기 기름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원체 사람이 선하시잖냐. 손해 좀 봐도 금방 잊어버려.”
“그치. 너의 아버지 정말 사람 좋으신 분이지.” 멀대가 고개를 주억주억 끄덕였다. “근데 진짜 우리 동네 사람들 보면 다들 참 착해. 그렇지 않냐? 순진해 빠져 가지고 세상 물정도 모르고. 나나 요 멍청이도 그렇고.” 멀대는 말끝에 턱으로 더벅머리를 가리켰다.
거즘 다 구워진 고기 중 자기가 맨 처음 집어먹을 고기를 뚫어지게 보며,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꿀꺽 남모르게 삼키던 더벅머리가 다시 심술이 부어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멍충이라고 하지 마, 멍충아. 너가 더 멍청하잖아. 킁.”
멀대는 짜증 내는 더벅머리를 보고 피식 웃은 뒤 다시 창 밖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난 이게 힐링이지 싶다. 힐링이 뭐 별거냐? 이런 게 힐링이지.”
동건이 무미건조하게 “그렇지” 짧은 맞장구를 쳐줬다.
세 사람이 구운 고기를 앗 뜨거 하면서도 각자 열심히들 씹고 있는데, 박 씨가 복화술로 귀에 거슬리는 비명을 냈다. 결국 입을 막았던 청테이프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저, 얘들아.”
동건 일당은 고기를 씹어대면서 박 씨를 바라봤다. “사실 내가 아침부터 굶었는데 나 고기 좀 주면 안 되겠니? 아까 땅 속에 오래 있었더니 땅이 몸의 기운을 다 빨아먹었는지… 너무 허기지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대가 젓가락으로 삼겹살 한 점을 집어 옜다 던져줬다. 그 고기는 박 씨가 앉아 있는 바닥에 떨어졌다. 더러운 먼지들이 고깃기름에 들러붙었다. 박 씨는 존심 상한 내색은 못하고 먼지투성이 삼겹살을 우울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한 개 더 드려요?” 동건이 너그럽게 물었다. 하지만 박 씨는 묵묵부답이었다.
멀대가 못마땅해했다. “이 아저씨 배불렀네. 아저씨, 자기 처지를 아셔야죠. 아저씨는 지금 거지예요, 거지. 거지면 거지답게 아끼고 절약하고 땅바닥에 던져줘도 고맙게 주워 먹어야죠.”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여하튼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없는 것들이 인성이 더 빻았다니까.” 멀대는 박 씨를 멸시하며 노릇하게 잘 구워진 삼겹살 한 점을 입안에 쏘옥 넣어 맛있게 씹었다.
박 씨가 억울한 목소리로 참고 있던 화를 터트렸다. “니들 정말 너무 한 거 아니냐? 이 정도 나를 모욕 줬으면 됐지, 삼십만 원 때문에 꼭 이렇게까지…삼십만 원을 명분으로 나 하나 처리하면 니들은 뭐 착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냐!”
동건이 박 씨를 살기 띤 눈으로 노려봤다. 시선만으로도 기가 죽은 박 씨는 알아서 움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후에 우는 소리를 했다. “어떡하면 좋겠니. 내가 어떡해야 되겠니?”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건이 예사롭게 말했다. “아저씨 그 옆에 걔하고 묵찌빠 해 보세요. 이기면 아저씨 고기도 주고 살려도 주고….”
“만약 지면? 킁.” 더벅머리가 고기를 입 안에 욱여넣으며 질문했다.
“묻어야지, 뭐.” 멀대가 동건 대신 큭큭거리며 대답했다.
“재밌겠다, 킁.” 더벅머리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그때 우준이 들보에 목이라도 매달린 것처럼 시끄럽게 복화를 내질렀다. 그의 테이프도 떨어져 입가에 간신히 붙어 있는 모양새가 됐다. “저, 저는 오늘 집에 가 봐야 해요. 부모님이… 기다려요… 저는.”
동건이 부처님 같은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너도 묵찌빠 이기면 보내줄게. 지면 죽는 거고.”
동건의 처사에 더벅머리가 감동했다. “와, 진짜 공정하다. 세상이 이렇게 공정해야 하는데, 킁.”
*
우준과 박 씨는 세상에서 가장 비장한 묵찌빠를 하기 시작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 놓인 우준의 등줄기로 쌔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둘 모두 손목이 등 뒤로 묶여 있는 상태였으므로 서로 등을 마주하고 묵찌빠를 행했다. 동건 일당은 중간에서 참견을 하며 시합을 진행시켜 나갔다. 몇 수의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우준이 찌를 내어 승리했다. 벅찬 감정에 싸여 우준은 찌를 낸 자신의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을 살린 손이었다. 반면 박 씨는 주책없이 비통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의 콧구멍에서 콧물이 나와 바닥까지 끊어지지 않고 늘어졌다.
“니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한 동네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 어떻게!” 박 씨는 비탄으로 얼굴이 뭉개져 울부짖었다.
동건 일당은 그의 불행 따위는 안중에 없이 다시 자기들끼리 먹는 일에 집중했다. 더벅머리가 고기를 포개 몇 점씩 한꺼번에 급히 입 안에 쑤셔 넣고는 불거진 볼을 씰룩이며 우물우물 얘기를 뱉었다.
“야, 빨리 먹고… 박 씨 빨리 묻어 버리고 킁, 가자. 나 집에 가서… 영어 공부해야 해, 킁.”
“영어 공부?” 멀대가 니 까짓 게 왠 쓸데없는 영어공부냐 하는 낯빛을 나타냈다.
“어머니가 취업 안 한다고 하도 닦달해서, 킁. 나도 이제 꿈이라는 게 생겼거든.”
“꿈? 왜, 다른 일 하려고? 농사 안 지을 거냐?” 너는 농사가 제격이라는 의미가 멀대의 눈빛에 들어 있었다.
“농사는 니들이나 지어라. 난 공무원 할 거야, 킁. 안정적인 직업이잖아. 킁.”
“지랄.” 멀대가 코웃음을 쳤다.
“뭐, 열심히 사는 건 좋은 일이지.” 동건이 밋밋하게 지나가는 어투로 더벅머리를 두둔했다.
멀대는 동건에게는 대놓고 뭐라 하진 못하고, 너까지 왜 그러냐는 불평 섞인 어조로 매가리 없이 푸념했다. “우리가 열심히 살면 뭐 하냐. 이 사회가 썩을 대로 썩었는데.”
*
동건 일당은 건물에서 나왔다. 더벅머리가 자기는 공부를 하러 가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엄마에게 혼난다고 하도 앵앵거리는 통에 그들은 일단 차를 세우고 어떻게 할지 논의하기로 했다. 멀대가 더벅머리의 유난스러움이 얄미워 곁눈질로 눈총을 줬지만, 눈치 없는 더벅머리는 좋아서 헤헤거렸다.
박 씨가 기다렸다는 듯 애걸복걸 우는 소리로 통사정했다. “얘들아, 나 좀 살려주라. 이제 동네 오는 사람들 죽이지도 팔지도 않을게.”
동건이 박 씨를 돌아봤다. 입을 막았던 테이프 쪼가리가 간신히 입가에 달랑달랑 붙어 있었다. 그는 뒷좌석 멀대에게 청테이프 꾸러미를 넘겼다. 멀대는 박 씨 입가에 붙어있던 테이프 쪼가리를 떼어버린 후 새 테이프를 뜯어 박 씨 입을 꾹꾹 눌러 막았다. 입이 봉해지는 동안 박 씨는 고개를 흔들어 방해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며 자기 처지가 억울하고 한탄스러운지 질질 짤 뿐이었다.
“야, 우리 조기 조 나무에 박 씨 묶고 가자.” 동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사람 한 명 정도 묶기에 딱 알맞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그 소나무는 소나무 군락에서 혼자 외따로 떨어져 길가로 불쑥 나와 있었다.
더벅머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들개 출몰 구역이잖아, 킁. 밤에 들개 존나 나타나는데…. 킁.”
동건도 사방을 휘 둘러봤다. “뭐, 어떠냐? 별일 없을 거야. 다 팔자소관이지 뭐. 지들 팔자 나쁜 게 우리 탓도 아니고. 여하튼간에 다 귀찮고 여기 묶고 내일 와서 생각하자.”
박 씨가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입에 붙인 테이프 쪼가리가 흥건한 침 때문에 한쪽으로 또 떨어져 나갔다.
“씨발, 테이프 어떻게 붙인 거냐, 킁.” 공격거리를 찾은 더벅머리가 멀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즐거운 감정을 애써 감추고 큰 문제라도 생긴 것마냥 멀대를 힐난했다.
꼬투리가 잡힌 멀대는 반박하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입을 쩝 다셨다. 그는 다시 테이프를 뜯어 박 씨의 입으로 가져갔다. 비교적 얌전히 있던 박 씨가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그는 이번엔 입이 봉해지는 것을 강력 거부했다.
“얘들아, 나 좀 그냥 살려주면 안 되겠니? 나 좀 살려 줘. 제발…!”
멀대는 박 씨 머리채를 움켜잡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부렸다. “살려주는 거잖아요, 씨발. 고작 들개 때문에 사람 안 죽어요. 쫌 가만있어요, 씨발.”
박 씨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더욱 세차게 상하좌우로 머리를 뒤흔들어 멀대를 애먹였다. “니들 내일 와서 나 죽일 거잖아!”
박 씨와 멀대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다툼을 동건이 뜨뜻미지근한 눈빛으로 보는 둥 마는 둥 시선을 거뒀다. “아저씨, 거 쫌 믿으세요. 살려준다잖아요.” 만사 피곤해진 듯 동건은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더벅머리가 턱짓으로 우준을 가리켰다. “근데 얘는 어떡하냐? 킁.”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멀대가 입에 테이프를 붙이느냐 마느냐 하는 박 씨와의 실랑이에 결국 개빡쳤는지 박 씨의 뒤통수를 한 대 빡 후려쳤다. “에이 씨발.” 욕설을 내뱉으며 그는 청테이프 꾸러미를 폐차 바닥에 냅다 내동댕이쳤다. 멀대에게 무안을 줬던 더벅머리가 화들짝 놀랐다. 차 안이 순간적으로나마 고요해졌다.
분이 안 풀린 멀대가 씩씩거렸다. “하여튼 박 씨 아저씨 진짜 씨발 동네 일거리만 만들고… 쟤도 으응…” 그는 우준을 가리켰다. “쟤도 일거리 아니냐고 씨발. 박 씨 아저씨 이 새낀 그냥 죽여야 해.” 그는 박 씨 뒤통수를 한 대 더 빡 후려쳤다. “야, 그냥 지금 죽이자, 이 아저씨. 이 새끼 죽여야 우리 동네가 평화를 되찾는다.”
난데없이 우준이 신음을 요란하게 크게 냈다. 모든 이목이 우준에게 집중됐다. 동건이 고개를 틀어 우준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의 입에 붙여 놓은 테이프를 쫘악 소리 나게 떼 냈다.
“너는 또 왜? 마지막으로 뭐 할 말이라도 있어?”
*
테이프를 뗄 때 입이 따가웠던지 우준은 입가 근육을 잠깐 동안 씰룩씰룩 풀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그는 동건 일당을 둘러봤다. 자기를 한 번만 믿어달라는 호소를 담아 한 명씩 시선을 맞추기까지 했다. 동건 일당은 물론이고 박 씨까지 눈을 끔뻑이며 우준에게 집중했다.
“제가… 제안할 게 한 가지 있는데요.”
“제안? 뭐?” 동건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저한테 저 아저씨 아주 깔끔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요.”
동건 일당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건 또 뭔 개수작이야, 무슨 개수작으로 우리를 속이고 엿 먹이려는 거야 의심하는 빛이 그들 눈에 매섭게 스며있었다. 동건과 멀대가 섬뜩하게 안광을 번득였다. 심지어 더벅머리의 어리버리한 눈에도 살기가 감돌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아 잔뜩 위축돼 있는 박 씨는 우준의 꿍꿍이가 불안해 어깨를 움츠리고 귀를 기울였다.
“어떤 방법? 뭐 어떻게 할 건데?” 헛짓거리를 했다간 죽을 줄 알라는 위협의 느낌으로 동건이 물었다.
“제가… 제… 제가 죽일게요.” 우준은 동건의 심기를 살피며 긴장하여 더듬더듬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동건 일당 세 사람 모두 표정이 일시 정지됐다. 더벅머리와 멀대가 정신을 차리고 동건이 뭐라고 응할지 기다렸다.
머뭇거리다가 우준이 덧붙였다. “제가 죽이면… 그럼 형님들 손에 피 안 묻혀도 되고… 저는 살인을 했으니까 어디 가서 말 못 할 거고….”
동건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세웠다. 그는 분주하게 헤아리느라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겁에 질린 박 씨가 멀대와 더벅머리에게 바삐 눈길을 보냈다. 설마 그렇게 할 건 아니지? 그건 안 돼!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이었다. 마침내 고민을 끝낸 동건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악랄한 웃음이 슬금슬금 기어 다녔다.
우준이 얼른 조건을 달았다. “대신 저는 좀 놔주세요. 어차피 저는 살인자가 될 테니 제가 오늘 보고 들은 걸 말하고 다닐 수도 없잖아요. 싹 다 못 본 걸로 할게요.”
동건이 찌릿하게 우준을 째려봤다. “잘할 수 있어?”
“네, 잘할 수 있어요.” 우준은 낮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동건 일당이 신뢰할만한 비장한 결의가 실려 있었다. 누가 들어도 얘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남을 죽이기로 작정한 애로구나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그런 말투였다.
“야, 박 씨 내쳐.” 동건이 시키는 대로 멀대와 더벅머리는 박 씨를 차 밖으로 매몰차게 내쳤다.
“안 돼! 안 돼!” 박 씨는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차 밖으로 안 나가려고 사력을 다해 떼썼다. 하지만 장정들의 거센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차 밖으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박 씨는 콘크리트 길바닥에 모로 누워 팔다리에 묶인 테이프를 벗겨내려고 팔딱팔딱 몸부림을 쳤다. 곧 포기하고 동건 일당을 곁눈질로 어렵게 올려다보며 불쌍하게 빌었다. “얘들아, 얘들아. 다시는 착하게 살게. 얘들아, 나 한 번만 믿어줘. 정말 착하게 살게.”
우준 역시 폐차 밖으로 내쳐졌다. 결박된 우준은 길바닥에 코를 박고 엎드려 버둥댔다. 그는 몸을 뒤집어 상체를 일으켜 앉으려고 낑낑댔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걸 보던 더벅머리가 우준을 굴려 자리에 바로 앉혔다.
동건은 차 밖으로 나가 거만한 태도로 우준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죽일 거냐”
우준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낫 주세요. 그걸로 죽일게요.”
동건이 더벅머리에게 고개로 까딱 신호를 보냈다. 곧 더벅머리가 폐차 안에서 낫을 가져와 동건에게 건넸다. 동건은 그 낫으로 우준의 팔다리에 꽁꽁 감은 테이프를 벗겨내려다 뭔가 찜찜했던지 동작을 멈췄다. “너, 도망가면 내 차로 받아버린다. 그럼 걍 뒈지는 거야.”
“네. 걱정 마세요. 저도 저 아저씨한테 쌓인 게 많아서… 씨발 저 아저씨 때문에….” 우준의 순했던 얼굴에 공격적인 악심이 뚜렷하게 아로새겨졌다.
동건은 우준의 그 표정을 안심해도 될 징표로 받아들이는 듯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벅머리에게 낫자루를 넘겨 테이프를 끊어내라고 눈짓을 보낸 후 폐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더벅머리가 우준을 묶었던 테이프를 모조리 베어냈다. 마침내 결박이 풀리고 우준은 장시간 혈액순환이 안 돼 시큰거리는 손목을 어루만졌다.
“팔 떨어져. 얼른 받아, 새꺄. 킁.” 더벅머리는 한껏 건방진 태도로 인상을 쓰며 우준에게 낫자루를 내밀었다.
낫을 건네받은 우준은 휙휙 휘두르며 한 발 한 발 박 씨 쪽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박 씨의 오열이 호들갑스럽게 터져 나왔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박 씨는 몸을 파닥파닥 뒤챘다. 우준이 박 씨 앞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는 찍을 곳을 정하려고 낫 끝을 박 씨 몸 여기저기에 시험 삼아 갖다 댔다. 처음에는 목에 갖다 대 봤다가 갸웃갸웃 망설이며 면상이나 어깨, 팔등 다른 곳을 겨냥해 보기도 했다. 박 씨는 오만상을 쓴 채 고개를 외로 틀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우준이 낫을 움직일 때마다 그는 잔뜩 쫄아서 경망스럽게 숨넘어가는 신음을 흘렸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한 박 씨가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슬그머니 뜰 즈음 우준이 기습적으로 박 씨의 팔뚝을 콱콱 내리찍었다. 추악한 비명이 길다랗게 작렬했다. 팔뚝이 점차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박 씨가 오버스럽게 몸을 팔딱거리며 고통을 표현했다. 우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 씨는 우준의 얼굴을 향해 울음을 악 쓰듯이 내질러제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강렬하게 표출했다. 과격한 울음소리는 곧 꺾여 점점 서러운 흐느낌으로 잦아들었다.
우준은 동건이 있는 폐차로 천천히 걸어가서 낫을 내밀었다. 자신이 할 일은 이제 다 했고 더 이상 할 일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는 어딘지 기분 나쁜 음습한 웃음을 머금은 채 동건을 바라봤다. 주제넘어 보이는 우준을 본 멀대와 더벅머리가 흥분하여 당장 달려들 것처럼 험악해졌다.
*
동건은 어안이 벙벙한 눈빛으로 우준이 내민 낫을 멍하게 봤다.
“왜? 아직 안 죽었잖아?”
그는 퍼뜩 정색을 하고 고압적으로 다그쳤다. “목숨을 딱 끊어서 죽여야지 인마!”
우준이 대꾸했다. “죄송해요. 못하겠어요.”
동건은 어처구니가 없어 차 밖 콘크리트 바닥에 날카롭게 침을 퉤 뱉었다. “씨발, 장난쳐? 일을 시작했으면 책임감 있게 해야 할 거 아냐! 왜 마무릴 똑바로 안 해!”
동건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성을 내자 우준은 얌전히 박 씨에게 돌아섰다. 하지만 낫을 쥔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우준에게 박 씨를 죽일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뭔가 내키지 않는 점이 있는지 머뭇머뭇하다가 동건에게 되돌아섰다. 동건이 왜 또 돌아서냐고 질책하듯 사납게 째려봤다. 우준이 주저대며 겨우 입을 뗐다.
“근데 저기, 정말 죄송한데요… 전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양심상 도저히 죽이는 거는… 사실 저는 벌레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거든요.” 생각만 해도 토증으로 속이 울렁거린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우준은 얼굴을 찡그리며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우준의 뻔뻔스러운 변심에 참을성이 바닥난 동건은 안색을 백팔십도 바꿨다. “아 놔, 이 새끼가 사람을 놀리나. 야, 씨발아! 양심은 너만 있어? 우린 없어?” 그는 우준을 당장 폐차로 밀어버릴 것처럼 상기됐다.
멀대가 불량하게 콧방귀를 뀌며 껴들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야, 저런 찐따가 뭘 할 수 있겠냐? 쟤 큰소리만 쳐놓고 못하는 거야. 쟤 사람 죽일 용기 없어. 쟤 못해. 고민할 거 없이 그냥 쟤도 지금 죽이자.”
동건이 손을 들어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야! 너 일로 와 봐.”
“동건아, 그냥 죽이자.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킁.” 더벅머리마저 동건을 거스르며 역정을 냈다. 생각지 못한 상황 발생에 불만이 생긴 멀대와 더벅머리는 우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동건을 탓하며 궁시렁거렸다.
“야, 너 일로 오라니까! 씨발 내 말 안 들려?”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 이성을 잃은 동건이 강퍅하게 고성을 질렀다.
우준은 쭈뼛쭈뼛 동건이 앉아 있는 폐차로 다가가며 고개를 떨궜다. 자연스럽게 열중쉬어 자세가 된 그는 안절부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동건은 그것이 의뭉스러운 연기인지 진심에서 나온 행동인지 알 수 없어 약이 올라 화가 나면서도 냉랭한 겉모습을 유지했다.
“내가 너한테 박 씨 죽이라고 시켰어? 니가 죽이겠다고 한 거 아냐. 왜 씨발 이제 와서 딴 소리야, 어!” 동건은 난폭하게 고함을 치며 얼굴을 구겼다. “그냥 풀려나고 싶어서 앞뒤 안 보고 죽이겠다고 장담한 거냐? 어디서 양심을 들먹여! 씨발 짜증 나게.”
우준이 웅얼웅얼 자기변호를 하려 하자, 동건은 쓸데없는 변명 댈 생각 말라는 뜻으로 무섭게 노려봤다. 우준은 얼른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괜히 착한 사람 코스프레하지 마, 사람 열받게. 니가 하겠다고 한 일 책임감 있게 잘 끝내. 자기 할 일 잘 하는 게 그게 착한 거야. 사람 한 명 죽이는 것도 못하는 무능력한 새끼가 양심 타령하면서 꼴값 떨지 말고….”
동건은 아니꼬워하며 벌레 대하듯 우준에게 경멸의 빛을 보냈다. 우준은 동건에게 거듭 몸을 굽혔다. 친구들 앞에서 체면을 구긴 동건은 우준을 재촉했다. “됐어. 할 일이나 빨리 해. 꾸물대지 말고.”
우준은 박 씨에게로 향했다.
불만으로 가득했던 더벅머리의 얼굴이 펴졌다. 이번엔 우준이 박 씨를 제대로 죽여 줄 것을 바라며, 그는 들뜬 기대감으로 고조되어 갔다. 회의적으로 찌푸리고 있던 멀대도 낯 색을 바꾸고 우준을 지켜봤다. 동건 또한 다행스러워하며 우준의 움직임에 시선을 몰입시켰다.
우준은 낫을 쥔 손에 힘을 꽉 쥐고 몸에 긴장을 유지한 채 박 씨에게 발을 뗐다. 하지만 그는 곧 팽팽했던 온몸의 맥을 힘없이 탁 풀어 버렸다. 정말 자신감이 없는 것인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우준은 다시 동건에게 돌아섰다. 흥분으로 두 눈이 번들거리던 동건이 완전히 기분 잡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우, 저 사람 한 명 못 죽이는 등신 새끼!”
핸들을 두 손으로 탕 내려치며 동건은 분노를 터트렸다. 우준은 재차 구차한 사과라도 할 것처럼 폐차로 걸어왔다. 멀대와 더벅머리가 우준에게 막 욕설을 내뱉는 순간, 돌연 면목 없이 다가오던 우준의 그늘진 낯빛이 바꼈다. 그에게서 갑자기 육식 동물의 기운이 발산됐다. 솟구치듯 우준은 순식간에 박차며 폐차 측면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전광석화와 같이 동건을 덮쳤다. 동건은 무능력한 이도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상태였다. 이런 찐따가 뭘 할 수 있으랴 방심하는 찰나에 동건은 바로 눈앞에서 우준을 맞이해야 했다. 우준의 얼굴 표면에 구정물 같은 추악함이 범벅져 있었다. 우준은 조금의 대처할 겨를을 주지 않고 낫을 번쩍 치켜들어 올렸다.
치켜올려진 낫이 동건을 미친 듯이 연속으로 내리찍었다. 두 손을 쳐들며 동건은 무의식적으로 낫을 피했다. 하지만 우준은 악착같이 차 안으로 상체를 들여 뒤로 피하는 동건을 좇아 연거푸 찍었다. 달라붙는 우준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모면할 방법은 없었다. 낫 끝이 손, 얼굴, 어깨 할 것 없이 곳곳으로 찍혀 들어가 깊숙이 베었다. 동건은 피투성이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동건의 한쪽 눈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찍혔다. 소름 끼치는 비명이 채찍처럼 길게 허공을 갈랐다. 우준은 하등의 고민 없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다른 쪽 눈도 끔찍하게 찍었다. 얼굴을 감싼 동건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짐승 같은 발작적인 비명이 계속 울렸다. 그럼에도 우준은 좀처럼 낫질을 중지하지 않았다.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 동건이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차 내 이리저리 몸을 부딪쳤다. 승리를 거뒀음을 인지한 우준이 그제서야 낫질을 멈췄다.
우준은 폐에서 나오는 깊은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준의 눈이 실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아직도 손을 휘저으며 차내에 부딪치는 동건을 향해 우준은 그악스럽게 침을 내뱉었다.
첫 번째 일을 능력 있게 해결해 낸 후 우준은 낫을 건들거리며 그 기세 그대로 저벅저벅 더벅머리와 멀대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겁쟁이들이어서 이미 바싹 얼어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경직된 얼굴들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더벅머리는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벌렁 나자빠져 울상이 되었다.
멀대가 조심조심 비위를 맞추며 더듬거렸다. “왜 그래? 우린 너를 좋아해. 널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어. 넌 착한 사람이잖아.”
엉거주춤 길바닥에 앉은 더벅머리는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난… 난… 너가 찾으러 온 사람을… 찾아주려 했는데… 킁킁킁…. 난 그럴려고 했는데…킁… 동건이가 널 살려주자고만 했으면… 킁킁… 동건이 때문에…킁킁킁킁.” 그의 입에서 킁킁 거리는 소리가 주책없이 연방 튀어나왔다.
우준은 낫을 위협적으로 치켜올렸다. 좇아오면 당장 내리찍어 죽이겠다는 몸짓으로 협박을 한 후에 서서히 발을 빼기 시작했다. 멀대와 더벅머리는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든 채 감히 달려들 생각을 못했다. 우준이 저지른 짓을 똑똑히 본 그들에게 반격을 가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악귀 같은 우준이 빨리 이 마을을 떠나 주기만을 바라며 부르르 떨었다.
우준은 몸을 돌려 현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이 비로소 두근거리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는 콘크리트길 옆으로 빠져 푸른 밭을 사선으로 가로질렀다. 아직도 꽉 쥐고 있는 낫자루에 피가 흘러 손 안은 피범벅이었다.
뒤에서 쿵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준은 뒤돌아봤다. 동건의 폐차가 전속력으로 튀어나가 박 씨를 받고 멈춰서 있었다. 박 씨는 끽소리 한 번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차는 맹렬히 후진한 뒤 급정지했다가 다시 급발진으로 전진했다.
“어, 오지 마! 오지 마! 우리 있어!” 멀대와 더벅머리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두 사람은 잽싸게 길가로 몸을 던졌지만 차에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동그라진 그들은 끙끙 신음을 냈다. 친구들이야 치이든 말든 동건은 차를 다시 뒤로 물렸다가 앞으로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눈이 먼 동건은 복수심으로 우준을 찾고 있었다. 우준의 고통에 찬 비명을 들을 때까지 차를 계속 앞뒤로 이동시킬 심산이 분명했다. 하지만 날뛰던 폐차는 길가의 소나무를 쾅 들이박고 멈춰 섰다. 동건이 박 씨를 묶자고 제안했던 바로 그 소나무였다.
우준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시뻘게진 시선으로 바라봤다. 강한 충돌로 인해 동건이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튕겨져 나간 그는 천천히 공중을 가로질렀다. 동건의 눈에서 떨어진 붉은 핏방울들은 점점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우준의 시야에 그 강렬한 광경이 오랜 시간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