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판타지 <눈물을 마시는 새>
고교 시절 톨킨의 소설 <반지의 군주>를 접한 이후 온갖 판타지 소설에 심취했다. 내 청춘의 거의 일이십 퍼센트는 환상소설 혹은 속칭 장르소설과의 시간이었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나와 신비로운 세상에 빠져드는 것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잊고 지냈다가 최근 뉴스에 다시 이슈로 떠올라 찾아보게 되었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영도 소설가의 대표작 <눈물을 마시는 새>다.
2~3년 전 20주년 일러스트 특별판이 출판되었다는 소식 이후 며칠 전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장르문학상인 <그랑프리 드 리마지네르> 외국 소설부문 최종 후보6편 중 한편에 올랐다. 이 뉴스를 접하고 나는 다시 20여년 전 신작소설로 읽던 시절이 떠올랐다.
늘 야근에 늦은 퇴근으로 야밤에 신정동 동산 골목을 오르던 시절이었다. 텁텁한 반지하방에서 요즘 같은 스마트폰도 없고, TV도 없는 공간에 나는 이불 속에 누워 빌려온 판타지 소설을 펴보던 시절이었다.
이영도 작가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에 책대여점(요즘에는 찾아볼 수 없다)에 예약하고 빌려온 책을 두근거리면서 열어보았었다. 그리고 잠을 설치며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은 웹소설 혹은 전자책으로 대여 받아 스마트폰으로 읽기 때문에 버스에서든 지하철에서든 혹은 커피전문점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동네마다 있는 대여점에서 책과 비디오를 빌려보아야 했기 때문에 연체료를 내지 않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읽었다.
이영도 소설가가 왜 이 책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전에 썼던 소설이나 기타 당시 다른 환상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많았다. 한국 판타지소설은 90년대 중반 태동한 한국 장르문학과 역사를 공유한다. 이영도의 초기작 <드래곤 라자>의 대히트는 출판사들이 이 장르의 상업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지금 보면 굉장히 퀄리티 낮은 소설들이 범람하게 되었던 단점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이영도 소설가는 이후 여러 편의 후속작을 쓰면서 작가 역량을 키워가더니 2003년 드디어 서구의 소재를 모방한 글쓰기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눈물을 마시는 새>였다.
당시 4권의 책으로 나눠 출판을 하였는데 이는 나가, 레콘, 도깨비, 인간 네 종족을 대표하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네 가지의 신을 각각 모시는 네 종족이 살아가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왕’의 개념, 권력의 무게와 책임, 신과 선주민, 사람의 미래, 숙원 등 여러 가지 철학적인 주제를 다뤘다.

책의 전반부(1권 심장을 적출하는 나가, 2권 숙원을 추구하는 레콘)는 나가들의 땅에서 누명을 쓴 한 나가를 구출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나가 사회를 중심으로 한 모험적 이야기와 정치적 스릴러 형태를 포괄하고 있다. 책의 후반부(3권 불을 다루는 도깨비,4권 왕을 찾아 헤매는 인간)는 전반부에서 몇 년이 흐른 후 나가와 나머지 세 종족간의 전쟁이 벌어지며, 이를 저지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이야기로 확대된다.
이야기는 대체로 특정한 주인공이 없는 군상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특별히 구출대의 인원이 중심인물이 된다. 그중 가장 비중이 높은 인물이 <케이건 드라카>다. 나가를 증오하여 나가살육자라는 별칭을 가진 그가 어떻게 구출대가 되어 나가인 륜 페이를 구출하고 일행을 이끄는 과정이 매우 인상 깊다.
“저는 나가를 증오합니다. 제가 지금 말한 문장의 주어는 ‘증오’입니다. 제가 없어져도 제 증오는 남을 겁니다.”
나가에게 무자비한 일화가 소개되는데 인간이면서 나가를 너무나도 증오하여 인간의 한계를 넘어버린 그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지, 혹은 다른 무엇으로 변해가지는 지가 이 소설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또 다른 인물로 도깨비 <비형 스라블>이다. 그는 폭력성을 싫어하는 인물로 작가가 새롭게 재창조한 도깨비의 기묘하지만 익숙한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와의 대화가 도깨비의 유쾌한 특징을 보여준다.
“아들아! 나쁜 소식이 있다. 나 죽었다!”
“어? 진짜네요? 그럼 씨름 출전자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은 삭제할게요. 막 돌아가신 거예요?”
책의 후반부에서는 피를 보면 폭주하는 도깨비의 특징을 견디고 극복한 도깨비로 종족의 한계를 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영도 소설가가 재창조한 종족 중 익숙하지 않은 기묘한 두 종족이 레콘과 나가다. 구출대에 합류한 레콘 <티나한>을 보면 기존에 다른 소설들에서 느끼지 못한 새로운 종족의 특징을 여실히 볼 수 있다. 하나의 숙원을 지닌 레콘은 숙원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티나한의 숙원은 하늘치에 오르겠다는 것. 도깨비와는 다르게 수틀리면 폭력을 휘두르는 종족이지만 나중에는 비형의 폭주를 막기 위해 물을 싫어하는 종족의 특성을 극복한다.
“누가 그러게 내버려둔대!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철의 대화다!”
하며 비형의 몸을 자신의 손으로 물을 떠서 씻긴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넋이 나간다.
나가는 작가가 창조한 종족 중에 가장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특히 심장을 적출하여 심장탑에 저장하는 의식을 통해 반불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놀랍다. 파충류의 여러 특징들을 고스란히 담아 종족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륜 페이>는 이러한 나가의 의식을 거부한 나가로서 멸종당한 줄 알았던 용을 키우는 자(나가는 숲을 사랑하고 숲에서 살아가므로 숲을 태우는 용을 싫어한다)로 살아간다.
소설은 많은 이야기를 담아 다양한 시선에서 전개되기에 기존에 양판되는 판타지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장면 전개가 마치 여러 편의 연결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어지간한 판타지소설 덕후들은 다 읽었다. 후속작 <피를 마시는 새>, 출판사 황금가지가 운영하는 웹소설 플랫폼 브릿G에서 공모 출판한 팬픽 엔솔러지<숲의 애가>도 함께 볼만하다.
소설의 핵심 줄거리를 공개하지 않는 선에서 소개 리뷰 했다. 이삼십 대를 관통하던 시절들을 회상하게 하는 책은 재미를 떠나 인생을 뒤돌아보게 한다. 과연 나는 어린 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혹은 숙원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 살아가고 있을까?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인생을 걸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다시금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시 읽는 재미를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