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 시집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자의 딸은 믿을 만하다.
남편이 나를 두고 가끔 장난삼아 하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한데, 내 귀를 즐겁게 하는 방점은 믿을만 하다는 나에 대한 평가보다는 알코올 중독자의 딸이라는 나의 아버지 서사에 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죽을 듯이 술을 마시다가 결국 죽었다’는 알코올 중독자의 서사이므로 나는 그 빈약한 서사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특히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문간방에 감금되었던 아버지의 간절한 술 심부름을 내가 몰래 해 주었다고 하는 대목이 있어 막연한 그리움엔 언제나 술냄새가 풀풀 풍긴다. 옷이 불룩한 채 문간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는 나를 붙잡아세워 옷 속에 감춰진 술병을 빼앗아 다그쳐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무조건 잡아떼었다고 하니 알코올 중독자의 딸은 믿을만 하다는 남편의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지난 가을, 내가 근무하고 있는 작은도서관에서 도외 작가 특강으로 이영광 시인의 시 창작 수업이 5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영광 시인을 맞이하면서 나는 시인의 시집이 도서관에 두세 권 쯤은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수의 출판사들에서 몇 권의 시집을 낸 유명한 중견 시인이니 말이다. 도서관 서가의 시집 칸에 시인의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수업이 이삼 일 쯤 지난 뒤였다. 근무하는 책상에 앉아 강의실 밖으로 흘러나오는 시인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다가 시인의 시들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수줍게 달아오른 얼굴과 숫기 없는 태도와 달리 수업할 때 시인의 말은 청산유수였고, 무엇보다 내용이 좋았다. 역시 다르긴 다르구나 하며 평소에 시 읽을 엄두를 잘 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집을 한 번 읽어볼 결심으로 서가를 뒤적이는데 810번대, 811번대, 812번대까지 칸칸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시인의 시집이 단 한 권도 없는 게 아닌가! 어쩐지 시인이 도서관에 온 첫날 서가의 시집 칸을 한참을 들여다보더라니….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시집을 급하게 구해 서가에 꽂아놓고 시인더러 여기봐라 할 수도 없고, 시인이 모른척 해주었으니 나도 모른척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의실 밖으로 유난히 너그럽게 들려오는 시인의 목소리에 민망해하며 자리에 앉아 있는데, 언제나 뒷벽에 사서의 배경처럼 쌓여있는 아직 등록작업이 안된 책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예상되는 결과대로 이영광 시인의 시집 한 권이 그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시집 제목은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시인의 손바닥보다 작고 손두께보다 얇을 것 같은 시집이었다. 스물세 편의 시와 에세이 한 편이 실린 조그마한 시집을 이런저런 전문 분야의 육중한 책들 속에서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적이란 당연히 벌어져야 할 인과를 두고 하는 말이니까.
시집 한 권 읽었다는 서사가 이렇게 장황하다. 하지만 읽은 후의 감상평은 짧을 수밖에 없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우선 한줄 평부터 해보자면 이영광 시집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시집이다. 알아본다. 알코올 중독자의 딸은. 진정한 술꾼을.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처럼 이영광 시인은 시에다 술을 쓰는 게 아니라 술에다 시를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시집에서 ‘술’이나 ‘마신다’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보았다. 이 자그마한 책이 삼킨 단어가 무려 50잔이 넘는다. 마지막에 실린 에세이 ‘명정(酩酊)수첩’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아예 대놓고 술 이야기다. 하여, 이 흔들거리는 시집을 앞에 앉혀두고 꼿꼿하게 감상평을 하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술꾼이 벗에게 가장 원하는 건 함께 취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함께 인사불성이 되어 필름이 끊겼다가 다음 날, 투명하게 다시 태어나 서로의 투명함을 알아봐주는 것. 나는 이 시집을 그런 술벗으로 권하며, 수록된 시들 중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의심할 수 없는 결론들
집안에 나는 절대 가 닿지 못할 경지를 보여준 어른이 두 분 계시다 평생 명정 만 리들이셨다 한 분은 40년 전 어느 겨울, 아랫마을 주막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돌아와 이틀을 앓고, 돌아가셨다 그 분의 아드님인 다른 한 분은 14년 전 세상을 뜨던 날 오전까지 빈집에서 오냐오냐 소주를 드셨다 곱기만 한 봄날에, 술상 앞에 쓰러져 잠든 채 발견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런 집안일 수 있을까 세상엔 대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있다 아니, 질문을 알 수 없는 대답들이 있다 즉, 의심할 수 없는 결론들이 있다 40년 전 그분은, 어린 내가 그날 저녁 리어카에 실어 와 우리 집 사랑에, 사랑하듯 눕혀드렸던 분이다
후일담을 하나 덧붙이자면, 늦은 밤 도서관 근처 편의점에 혼자 앉아 있던 모습이 목격되곤 하던 이영광 시인은 서울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에 택배 상자를 하나 보내왔다. 열어보니 시인이 그동안 출간했던 시집들이 들어 있었고, 앞장마다 멋진 필체로 친필 사인까지 적혀 있었다. 어린 시절 아랫마을 주막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있던 집안 어른을 리어카에 실어 와 사랑하듯 눕혀드렸다던 그 고분고분한 손길로 도서관의 빈 서가를 오냐오냐 말없이 채워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알코올 중독자의 후손은 믿을만 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