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숙 시집 <꿈을 나눠 먹어요>(여우난골, 2025)
꾸잉은, 그러니까 임대아파트 입주민이자 이주민이다 한때 유행처럼 몸에 들인 흥건한 노동 국경을 넘어온 떠도는 신발이다 고기 굽는 냄새 자욱한 골목식당을 그을음으로 전전하는 그녀 소쿠리에 나물을 다듬다가도 딸꾹질 같은 우리말을 더듬으며 서빙을 한다 머리를 묶은 검은 눈동자가 돌아갈 곳을 잃은 얼룩말을 꺼내 입는다 도심 언저리는 그녀가 입주하지 못한 광할한 세렝게티 뿔, 발톱, 늘어진 갈기를 감추고 유유히 활보하는 사자의 발자국들 속에서 이방인이라는 꼬리는 가지런한 먹이, 야생은 사람들이 펼쳐내는 몸뚱이 그녀의 얼굴이 좀처럼 웃지 않는 줄무늬를 벗고 몸피 불린 하루를 끌고 저문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사파리 오늘도 안녕, 두고온 하늘을 추스르며 흔들리는 빗줄기가 비음 섞인 콧소리를 내며 눈시울의 긴 우기를 견딘다
<이주민> 전문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택 건설 현장, 식당, 마트에서 일하는 모습들이다. 그 사람들은 이 머나먼 이국땅에 자본주의라는 괴물 같은 현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 이국땅에 오래도록 머물다가 동화되어 우리들 주변에서 우리와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물을 먹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이들에게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보다 이방인이라는 말보다 이주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저들과 우리라는 감정의 경계를 만들어놓고서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고 같이 일하며 어울려 살아가는 걸 보며 과연 저들에게 쉽게 이방인의 꼬리표를 붙일 수가 있을까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도록 놔두기보다 여기를 다시 새로운 고향처럼 느끼게 살아가도록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 아닐까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열어놓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온 떠도는 신발’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딸꾹질 같은 우리말을 더듬’어도 친근하게 마주 웃으며 대화하며 도우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달걀 껍질마다 금이 간 경력이 그어지고
생일날 이력서를 들고 뛰어내린 뼈
기간제를 살다 한순간에 버림받은 뼈
달빛 노동을 하다 스러진 뼈
현수막으로 나부끼다가 스스로 날개를 접은 뼈
발버둥 치던 이름 없는 뼈들이 너덜거렸다
사람들은 먹자고 한 일이라 무죄를 주장했고
식욕은 돌림노래가 되어 우행처럼 떠돌았다
배달의 역사는 늘 아찔한 속도로 손끝에서 오래도록 무책임했다
종종 식어버린 그들의 희생을
조각조각 씹어대는
당신은 한 무리인가
<나는 치킨의 감정입니다> 일부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한자리에서 나는 폐쇄된 무리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과 명성만을 쫓아 주변에 쓰러지는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문해 본다. ‘기간제를 살다 한순간에 버려진’ 혹은 ‘달빛 노동을 하다 스러진’ ‘현수막으로 나부끼다 스스로 날개를 접은’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하고 살아온 생을 후회한다. 너덜거리는 뼈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나. 역시 힘겨운 노동의 시간을 살아간다고 자위하며 ‘무죄를 주장’하던 나도 후회한다. 비록 앞장서지 못할지라도 무책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열린 무리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문을 열어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