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안과 밖
지역이라는 난감함
오랫동안 문학잡지의 편집위원을 해오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특집을 기획하는 일이다. 이견 없이 바로 선택될만큼 중요한 이슈가 매 계절마다 생겨날리는 없고, 그래서 문학 장르에 내재된 근본적 특징이나 역할을 조명해보고자 하면 그것은 또 독자 입장에서는 이미 반복되어 온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 조금은 겸연쩍은 이야기이지만, 경험적으로 말해보자면 이럴 때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가 ‘지역 문학’이다. 요컨대 ‘지역 문학’은 최소한 문학적 주제로의 선택 과정에서 소위 ‘주류 문단’의 시선에 따라 의미 부여가 결정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때 ‘지역’이 명확한 의미 범주나 기준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은 난감함을 가중시킨다. 지역 문학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어야 하는 이 글에서, 조금은 부적절할지도 모르겠지만, ‘지역’이라는 의미 자체에 부딪힌 개인적인 느낌을 말해보고자 한다.
서울, 그리고 지역
지역 문학을 주제로 정하고자 하는 편집회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먼저 특정한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학적 활동들 또는 그 중의 특정 작가(군)에 주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의 지역은 ‘서울’을 기준으로 한 그 외 다른 장소들을 의미한다. 이는 물론 지리적 차원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중심-주변’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과 겹쳐진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서울과 지역의 구도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문학을 비롯해서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면, 자본주의 체제 확립의 근간으로 도시 성립에 주목했던 독일의 경제학자 좀바르트의 진단을 참고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자본과 인구의 집중을 따라 ‘도시’가 발생는데, 그렇게 생겨난 도시 공간은 이른바 ‘금리 생활자’들의 거주지라는 성격을 갖는다. 말하자면 1차 산업 종사자를 비롯한 관련 산업 시설물들을 도시 경계의 바깥으로 밀어내버리면서 도시는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상품의 주 소비지는 도시이기 때문에 결국 도시는 자신의 바깥, 즉 ‘지역’에서의 생산물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착취구조의 원동력이자 그 결과물이다.
요컨대 ‘중심’이나 ‘주변’은 사실상 단순한 지리적 기호에 불과했으며 실제의 현실 공간에서는 무수히 많은 ‘중심-주변’이 어지럽게 겹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구조의 확산과 함께 의미적·기능적 대립의 ‘도시↔지역’이라는 수직적 체계 안으로 모두 기입된다. 따라서 ‘서울’의 대립항으로 상정된 ‘지역 문학’에 대한 시선에 우리는 ‘서울’로 편입되지 못한 채 소외된 곳의 문학을 살펴본다는 시혜적 차원이 내재되어 있음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는 작가’라는 표현이 ‘서울’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이같은 내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역성이라는 과거와 미래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한 지역과 깊이 결부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 또는 그것에 천착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를 주목해보는 일이다. 앞선 기준과 비교해보자면 ‘서울’이라는 우리 사회의 블랙홀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도 있고, 지리적 차원의 관점이 아니라 거기에서 비롯된 역사적·정서적 가치가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보다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지리학적 관점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어떤 공간은 여러 가지 조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기후나 자연적 환경 등의 물리적 요소를 비롯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적 경험, 그리고 이와 같은 경험들의 총체로서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심리적·내면적 요인에 이르기까지 그 조건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지리학자 렐프는 이와 같은 문화적 맥락이 객관적 차원의 ‘공간’을 ‘장소(place)’로 변모시킨다고 말했다. 이때 장소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의 맥락적 특수성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이른바 ‘장소 정체성(identity of place)’이다. 앞서 문학작품이 반영하고 있는 ‘지역과 결부된 특징’이라고 말해본 것은 이와 연관되어 있다고 이해해볼 수 있다. 어떤 지역이든 그곳에만 누적되어 온 문화·역사적 의미가 존재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해온 가치관의 총체가 곧 지역성이다.
하지만 이같은 지역성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더 이상 그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어지고 있다. 공간 역시 지속적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고, 이에 따라 공간은 이윤 추구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또는 언제든 삭제 내지 변형이 가능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에서 지역성이란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거나, 아니면 이윤 획득이 가능한 범주에서만 인정될 뿐이다. 서로 다른 지역임에도 새롭게 형성된 도심지의 모습이 천편일률적인 것은 지역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자본적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 오제는 이같은 현상을 두고 교통 수단의 발달이나 이미지의 전지구적 확산을 따라 벌어지는 ‘공간의 과잉’이라고 진단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정체성이나 역사적 정의와 전혀 상관없는 공간, 이른바 ‘비장소’만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유기적 관계가 더 이상 불필요해진 공간을 살아가는 현실에서 지역성을 바탕으로 한 ‘지역 문학’이란 결국 단순하게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으면서 또 다른 공간으로부터의 소외와 고립을 넘어 새로운 관계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 문학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과 가능성 사이에 끼여 있는 셈이다.
엑소-플라테이아
최근 노벨 문학상 수상이 유력한 작가로 다와다 요코를 꼽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오래전부터 독일에 살고 있는 그는 독일어와 일본어 두 언어로 창작활동을 하는 조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는 독일어로 쓴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일본어로 번역해서 출간하기도 했는데, 말하자면 두 언어로 창작하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언어의 매개-번역자이기도 한 셈이다. 다와다 요코는 그런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 또는 창작 태도로 ‘엑소포니(exophony)’를 내세운다. 일반적으로 엑소포니는 모국어가 만들어내는 환경의 바깥으로 나아간 상태 전반을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언어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단순히 지식의 확장으로 새 언어를 추가하거나 또는 우열을 구분하면서 어느 한 편의 언어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어떤 언어로 소설을 쓰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언어의 모습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에 잠재하지만 아직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을 끌어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다와다 요쿄, 유라주 옮김, <여행하는 말들>, 돌배개, 2018, 26쪽.)
위의 언급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엑소포니는 모국어로 만들어진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그동안 우리의 인식이 배제시켜온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나는 ‘언어’를 ‘지역성’으로 대치해도 거의 유사한 문제의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 문학이 특정한 장소와 결부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같은 가능성이 대척점의 또 다른 무수한 장소들과 만남을 예비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도, 또 이 만남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각 ‘장소(plateia)’의 ‘바깥(exo)’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분명해보인다. 지역에 머물면서 최대한 지역을 벗어나기. ‘지역’의 범주와 의미에 대한 난감함에서 비롯된 나의 생각은 현재 여기에서 멈춰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