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족보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보상금 민원창구 앞에 앉으면서도 똑같은 독백을 되풀이했다. 우편물을 개봉하던 순간의 충격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뭐 문제가 있나요.”

  보상금 결정 통지서를 받아든 직원이 나를 응시했다.

  “거기 나온 신고자 분 연락처를 알고 싶어서요.”

  나는 떠듬거리며 창구 여직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건 곤란해요. 개인정보보호법에 걸려요.”

  비무장지대 침입이란 소리로 들렸다.

  “희생자가 우리 집안과 형제자매 관계란 게 이해되지 않아서 그래요.”

  나는 의자에 눌러앉은 채 나직하면서도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다행히 뒤에는 민원인이 없었다. 잠시 뒤 담당자가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돌렸다.

  “고○원 사후 양자인 고○표와 형제예요.”

  기막히고 황당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해법이 없었다. 시간을 다투는 일도 아니었다. 증조부, 조부 제적부를 챙겨 주민센터 건물을 나섰다. 머리가 거미줄을 뒤집어쓴 듯 복잡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형님. 다음 주까지 원고 부탁. 꼭!’

  ‘한월초등학교 100년사’ 편집위원장이었다. 이웃마을 출신의 의형제 같은 후배였다. 거듭 원고 독촉을 받고서도 지금껏 미적거리고 있었다. 두 얼굴의 청년이었던 아버지에게 선뜻 다가설 용기가 없었다.

  지난겨울 폭설이 내리던 날에 만나 술을 한잔하는 자리에서였다.

  “형님도 백년사 집필자로 선정했어요.”

  생존한 동창생, 작고한 졸업생의 유족 이야기를 한데 엮는다고 했다. 예닐곱 마을 출신 학생이 다니는 학구였다. 아버지와 나는 19회, 40회 졸업생이었고 후배는 내가 졸업한 뒤 입학했다.

  아버지의 당시 행장은 전무했다. 누렇게 바랜 증명사진, 면사무소 직원들과의 합동사진, 그리고 ‘제2연대 제주도주둔기 사진첩’뿐이었다.

  “아버지에 대해선 할머니에게 들은 파편 조각이 전부야.”

  “이 기회에 모교에 주둔했던 토벌군 만행도 고명으로 얹히세요.”

  참회록이라 생각하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시 한월국민학교에는 9연대, 2연대가 주둔했다고 들었다. 집단 양민 학살의 주역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교에 주둔하지 않은 듯했다.

  “그것도 연좌제 족쇄가 되겠네.”

  문득 성서 구절이 소주잔에 고였다. ‘자식의 죄 때문에 부모를 죽일 수 없고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다. 오직 사람은 저마다 지은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튼 생각해 볼게.”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텅 빈 거리였다. 간간이 체인을 감은 자동차들이 파도소리 같은 금속음을 흘리며 지나갔다. 고향 마을의 잔영이 부표처럼 넘실거렸다. 우영팟 울담을 넘어서면 바닷가 백사장이었다.

  바닷가 동네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두어 시간 거리였다. 날씨에 따라 등하굣길이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곤 했다. 책보를 허리에 휘감고 신작로를 따라 걸어다녔다. 비바람, 눈보라가 쳐도 한결같았다. 우비, 외투도 없었다. 한겨울에도 맨발에 고무신이었다.

  일이학년 때는 신작로에 집결해 고학년 선배들과 학교로 출발했다. 신작로 가를 따라 밧줄처럼 한 줄로 걸어갔다. 자갈투성이 신작로는 바람과 파도소리의 골짜기였다. 바람 이름에 따라 등하굣길이 몸에 날개가 달리기도 하고, 역풍에 낭창거리는 작은 고깃배가 되기도 했다. 쾌청한 날은 신작로 고랑창을 따라 달리기 시합도 하며 학교를 오고갔다.

  그리고 신작로 둔덕의 늙은 소나무 두 그루가 시야에 잡히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만치 학교가 보이는 지점이었다.

  학교 마을 출신의 선생님은 줄기와 가장귀가 옆으로 배배 꼬이고 뒤틀려 괴상망측하게 생긴 그 소나무에도 이름이 있다고 했다.

  어느 소풍 날 그 앞을 지날 때였다.

  "마을에서는 저 쌍둥이 같은 노송을 ‘이본송(二本松)’ 또는 ‘니혼마츠’라고 불러요. 아마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해안마을을 따라 처음 일주도로가 생길 당시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인 것 같애···."

  담임선생은 소풍 장소에 도착하는 동안 신작로가 생길 당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을 구역별로 땅을 내놓고 주민을 동원해 길을 뚫었다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밟았던 길, 같은 건물 지붕 아래에서 가슴에 뼈를 세워갔다.

  그리고 국민학교를 졸업하며 성내로 나왔다.

  ‘생사람 잡는 이 동네에선 숨 막혀 못 살겠다.’ 제주시로 나가 물질하며 살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고향을 떠난 이유였다. 동네 남자들을 홀리는 잡년이라는 악성 입질 때문이었다. 젊은 홀어멍인 데다 곱상한 얼굴에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붙임성 있는 게 죄였다. 그렇게 산지항이 내려다보이는 동네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회의 시간 삼십여 분 전이었다. 나는 출판사에 도착하자마자 ‘제주고씨 ○○○파 賢信公 系譜’ 수정본부터 꺼냈다. 이번에도 내가 총대를 메야 할 작업이었다. 삼십 년 만에 나오는 증보판이었다. 탐라국이 종말을 고한 이후 고을나 왕손은 중시조를 기점으로 나뭇가지처럼 아홉 계파가 생겼다. 선조의 호(號)에 ‘공(公)’을 붙여 ‘○○○파’ 하는 식으로. 우리 집안의 파조(派祖)는 한성판윤 등을 지냈는데 무덤은 황해도 개풍군에 있다.

  ○○○파조의 9세손인 기흥 공은 고향 마을의 ‘방추굴’이란 자연부락을 설촌한 터줏대감이었다. 오륙십 가호였는데 타성바지는 스무남은 정도였다 한다.

  기흥 공은 가난했지만 글공부 욕심이 많았다. 붓과 종이 대신 밥상에 검지로 글자를 쓰며 익혔다. 무쇠솥 뚜껑 손잡이에 끈을 묶어 이마 높이만큼 천장에 매달아 졸음을 몰아내며 주경야독했다. 그렇게 해서 초시, 전시에 급제했다는 일화가 대를 이으며 구전되고 있다. 집안뿐만 아니라 마을의 자랑으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유서 깊은 방추굴 동네는 4·3 광풍의 불꽃, 연기로 사라졌다. 오손도손 모여 살던 이웃사촌들도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종갓집 직계 집안은 바닷가 마을로 내려와 다시 터를 잡았다. 조상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편찬회의 자리에서 언급할 내용을 메모했다. 다시 화보 지면으로 돌아갔다. 첫 페이지 종훈(宗訓)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리는 耽羅國 高乙那王의 후손으로서 한집안 한핏줄기임을 자랑한다….’ 당초 본관은 탐라고씨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제주고씨로 변경됐다. 멸망한 탐라국 후예이기를 거부한 조치인 듯했다.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다. 탐라국 되찾기 투쟁을 벌이면 어떨까 하는…. 멸망했던 대한제국은 절반의 대한민국으로 부활했다. 하지만 이내 자괴감이 들었다. 어느 시인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노래한 시 구절이 다가왔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온갖 허접스러운 망상에 빠지는 내가 더 한심스러웠다.

  처음 ‘현신공 계보’를 제작한 것은 1994년이었다. 최초로 탑동광장에서 4·3합동위령제가 열리고, 도의회 주도로 희생자 신고를 받던 해였다.

  그런데 5월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저는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는 고문두라 하는데요 교수님이 우리 집안 종손이라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국어 교과서를 읽듯 건조한 어조였다. ‘이 당 저 당 궨당(眷黨)이 제일’이란 말이 생각났다. 토박이들이 구비전승하는 어록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일가친척이 최고라는 언어유희였다.

  “고향의 뿌리를 찾기 위해 제주에 와 있습니다. 백부님 혈육도 만날 겸해서···.”

  달포 전에 별세한 부친의 유언이라 했다. 일단 그가 묵는 숙소와 연락처만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흥공계 족보’를 뒤졌다. 그런데 그의 부친 고석걸은 단기 4281년 5월 사망한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순간 조총련, 만경봉호, 그리고 제주인들이 연루된 수많은 간첩단 사건들이 똬리를 틀었다.

  다음 날 종친회장을 내세워 그가 묵는 호텔을 찾았다. 방패연 두상의 고문두 족장은 서글서글하고 온유한 인상이었다.

  그가 내민 양면괘지에는 붓으로 쓴 직계 가족들이 나열돼 있었다. 그리고 제적부로 시선을 모았다.

  “여기서 보듯이 석 자 건 자 어른은 제 백부입니다.”

  “석건 족장은 팔월 초하루 문중 모둠벌초에 꼬박꼬박 참가했던 궨당인데···.”

  종친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문두 족장을 쳐다봤다.

  “부친은 사삼사건 당시 일본으로 밀항했답니다.”

  그리고 제주 출신 재일동포 딸과 결혼해 2남 3녀를 뒀고, 지금은 손주들도 열서너 명이라 했다.

  “제 가족들이 들어간 족보를 만들 수 없나요.”

  제작비는 고문두 족장이 전담하겠다고 했다.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 석걸 족장 고향은 이웃 중산간 마을인 산덕리였다. 낮에는 토벌대, 밤이 되면 새벽까지 산사람들에게 시달렸다. 안팎곱사등이로 살던 그의 부친은 무장대를 따라 산사람이 됐다.

  그런데 자리가 마무리될 즈음 종친회장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수남이 종손. 이 기회에 따로 ‘신현공 계보’를 만들도록 하지.”

  “···.”

  나는 어리둥절했다. 기흥 공 장남의 8대조 직계와 방계만 족보를 출판하자고 했다. ‘기흥공계 족보’가 나온 지 수십 년인데 어느 하세월에 증보판이 나올지 모른 상황이긴 했다.

  “그래야 지난번에 누락된 부분도 보충할 테고···.”

  이제 족보에도 4·3 당시의 사망 연월일을 기재하고, 물애기와 어린애들도 등재할 세상이 됐다. 그게 망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다.

  노인회장과 헤어진 뒤 둘이만 자리를 옮겼다. 나는 술보다 그의 부친의 파란만장한 생애담에 더 취했다.

 

  석걸 청년은 몇몇 밀항자들과 고깃배를 삯내 일본에 도착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오사카 이쿠노구에 잠입했다. 일제 때부터 제주인들의 집단거주지였다. 일본 미군정에서는 이단분자들의 소굴로 여기고 있었다. 석걸은 철공소에서 먹고자며 연명하기 시작했다. 오직 목숨 하나가 전 재산이었다.

  철판을 불에 달궈 망치로 두들기며 대형 보일러를 제작하는 공장이었다. 한여름에도 앞치마 같은 두꺼운 누더기를 걸치고 견뎌야 했다. 잠시도 공장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말 모르는 벙어리, 낯선 땅의 눈뜬봉사 신세였다. 그런데 일 년쯤 지나서 외국인 등록증을 받았다. 일본 사회당에서 제주에서의 무장대 활동을 확인한 뒤였다. 철공소 사장과 오사카현 의원의 돈독한 연줄 덕택이었다.

  1959년이 되자 북한으로 들어가는 길도 열렸다. 당시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앞서 나갈 때였다. 석걸도 조총련 유혹에 빠져 북으로 떠날 뻔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처갓집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었다. 이미 세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부친은 당신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가도 남을 위인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어요.”

  다복한 대통령으로 자수성가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현해탄을 건넌 뒤 한 번도 제주 땅을 밟지 않은 채···.

  그런데 문두 족장은 갑자기 엉뚱한 데로 화제를 돌렸다.

  “제주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지냈다고 들었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오사카에서는 삼 년 전에 제주 심방을 초빙해 추모굿을 했어요. 재일동포 이삼세가 주최한 행사였는데 육백여 명의 참석자 절반 이상은 사삼사건 현장에서 구사일생한 어른들이었어요.”

  나도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했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는 도쿄 유족회에서 처음 추모행사를 가졌다. 그 무렵 4·3을 생각하는 모임’도 생겼고.

  “나도 본격적으로 오사카 유족회 후원자가 되기로 했어요.”

  부친을 대신한 4·3 신원(伸冤)풀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족장이 무슨 말입니까.”

  그가 호텔 현관의 회전문으로 사라지기 전에 던진 의문부호였다.

 

  편찬위원 다섯이 다 모였지만 실망했다. 나는 애써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입을 열었다.

  “족장님네 먹고사는 일처럼 발 벗고 나서줍서.”

  직계, 방계에 따른 자료 수합이 분담돼 있었다.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불평이 쏟아졌다.

  “이번엔 종친회 명부는 뺍시다. 개인정보보호법으로 일일이 개인 허락을 받을 수도 없으니···.”

  “그사이 거주지를 육지와 외국으로 옮긴 사람들도 많아요.”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빠진 치아는 잇몸으로 남길 수밖에 없어요.”

  가장귀의 잔가지를 추적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신음하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저쪽 마을에 있는 형님네 가족은 더 이상 손대지 않겠어요.”

  이산가족 상봉 이후 딱 한 번 재일동포를 통해 서신을 주고받은 게 마지막이라 했다.

  “그래도 백 살까지만 버티며 기다려봅서.”

  누군가가 말곁을 놓았다.

  “참, 저쪽 국무위원장도 탐라왕국의 피가 섞였는데요.”

  내가 무의식중에 불쑥 내던진 말꼭지였다. 그의 생모가 제주 출신 재일동포였다. 어느 파조(派祖)의 후손인지는 모른다.

  “···.”

  정적감이 거센 파도처럼 편집실을 덮쳤다. 모두 묵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황급히 유리벽 너머 전산실로 눈길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글쎄. 내 죽기 전에 ‘나는 고을나 왕족의 외손자요.’ 하는 세상이 오려나···. 아무튼 이번이 마지막 족보 손질일지 모르니 최선을 다해 봅시다.”

  종친회장이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숨통을 조이던 마스크를 벗으니 새 세상을 만난 것 같네.”

  마지막으로 출판사 현관을 나서던 족장이었다. 며칠 전에야 코로나19 종식이 선언됐다. 3년 4개월 만이었다. 삼사십 년 같은 악몽의 계절이었다.

 

  나는 내친김에 제적부를 놓고 정체불명의 청년과 우리 집안의 퍼즐 맞추기에 들어갔다.

  우선 봉투 속의 유인물을 꺼냈다. 한꺼번에 날아든 석 장의 통지서였다. 2002년 11월 20일의 제주4·3사건희생자 및 유족결정 통지서. 신고인 김덕후는 희생자 김시희 조카였다. 희생자 김시희는 1929년 3월 20일생으로 ‘미혼, 4·3 당시 사망’, 사유는 행방불명이었다. 그리고 2023년 4월 25일자의 보상금 지급 결정서. 내가 신청인으로 기록됐는데 김시희와 형제자매 관계였다. 보상심의분과위원회에서 보조원을 채용해서 희생자와 관련된 제적부를 수합해 결정했다고 들었다.

  제적부를 통해 어렴풋이 김시희의 정체가 드러났다. 증조부가 서른 살에 사망한 직후 양아들이 된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모 오일선은 4년 뒤 신좌면 함덕리 김○행과 혼인한 기록이 있었다. 증조모가 김시희의 생모였다. 김시희는 할아버지와 성씨가 다른 형제, 아버지의 작은아버지, 내게는 당숙뻘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나는 뒤늦게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믿기지 않는 우연이었다. 전생은 한 태반의 일란성쌍둥이가 아닌가 싶었다. 김시희와 아버지는 1929년생 동갑내기인 데다가 출생일도 3월 20일과 3월 21일이었다. 김시희가 하루 앞섰다. 모두 음력일 터였다. 스무살 전후에 시공을 달리하며 행방불명된 기막힌 운명의 청년이었다.

  아무튼 생존해 있는 그 조카를 만나야 했다. 그게 살아있는 자가 고혼의 넋을 위령하는 도리라 생각했다.

  “난 그 피 묻은 돈 안 받겠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가 생면부지의 목숨값을 거절하겠다며 쟁반의 사과 조각을 포크로 찍었다. 어머니도 형제자매 몫으로 보상금을 받게 된 터였다.

  스물두 살 때부터 ‘피가 잘잘 나는 아들’ 하나를 유일한 태양으로 삼아 버텨온 여인이었다.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 나와 아버지는 스무 살, 어머니와는 스물한 살 차이였다. 나를 아비 없는 후레자식 말을 듣지 않게, 사람 구실을 하는 아들로 키운 것은 어머니의 피눈물이었다. 가끔은 껌껌한 방에서 흐느끼는 한숨을 쏟아내기도 했다. ‘네 아방이 내 인생을 망쳤어···.’ 그러면서도 평생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내 오목가슴에 세운 홍살문이었다. 내 유년의 하늘도 어머니처럼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땅바닥에 드러누워 발버둥이치며 해와 달, 별을 보며 정수리가 굳고 가슴에 뼈를 세웠다. 늘 웃는 듯 우는 듯한 얼굴로···. 반달형 눈꺼풀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십여 년 전, 희생자 신고 당시의 김덕후 연락처는 자택 전화번호였다.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고 당시 주소인 함덕리 456번지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고···.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연락이 닿은들 내 신원과 용건을 밝히는 게 구차하고 거북했다. 하지만 무조건 보상금만 챙기는 것은 죄악이란 강박에 사로잡혔다. 꿈속에 정체불명의 초상들이 어른거리기도 했다.

  오랜 절친인 행방불명희생자 유족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큰일날 소리 허지 말게.’ 개인정보보호법이 완강한 거부 이유였다. 그가 추천한 함덕리 4·3유족회장도 함부로 연락처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귀띔했다. ‘우리 마을 노인회장님을 만나보세요.’ 무슨 행사장에서 수인사를 나눈 기억이 있는 분이었다. 언젠가 방송을 통해 4·3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어제 함덕리 노인회장과 전화통화가 됐다.

  “아이구, 고수남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반색하며 알은체함에 안도했다.

  “정년퇴임한 지 십여 년이 지나 지금은 전 교숩니다.”

  나는 이내 깃털 같은 웃음소리를 거뒀다.

  “언제 시간을 내주실 수 없을까요.”

  일단 만나서 기억의 그물질을 하며 은근히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럽시다.”

  내일 당장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 내친김에 아내와도 함덕 단골 숙소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나는 해안도로변 해수욕장 중간 지점에서 바닷가로 뻗은 둔덕 주차장에서 내렸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현장에 도착했다. 시내를 빠져나오는데 한 번도 적색신호에 걸리지 않았다.

  바닷가에 접한 건물로 들어섰다. 레스토랑을 겸한 커피숍이었다. 돌담벽의 고풍스러운 한옥, 양옥 양식을 아우른 구조였다. 오십 년 전, 내 결혼식 날에도 저녁놀을 바라보며 추억을 담았던 곳이다. 당시에는 국민학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뒤에도 결혼기념일에는 종종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바닷물이 건물에 잇닿은 바위까지 밀려들어 있었다. 유람선 갑판에 앉은 기분이었다. 수채화 같은 주변 풍경이 황홀했다. 나는 목을 축이며 시선을 좌우로 굴렸다. 해안도로가 해수욕장 잔디밭을 끼고 서우봉 자락으로 휘감겨 나갔다. 서우봉은 뱃머리처럼 바다와 벼랑을 이루며 끝났다. 동녘 끝자락에는 일제의 유산인 인공동굴도 있다.

  1974년 4월 학교가 다른 곳으로 떠난 주위는 공용주차장, 호텔, 각종 간판이 내걸린 건물이 즐비했다. 황소가 드러누운 형상의 서우봉과 연초록 바다, 은빛 모래밭이 어우러진 만화경 같은 한 폭의 풍경화였다.

  “이 바닷가는 칠성신의 상륙지이기도 해요.”

  노인회장이 수인사를 나누며 던진 첫마디였다.

  어미 뱀과 그 자식인 일곱 마리 뱀이 들어있는 함이 파도에 밀려온 곳이란 말이었다. 집안의 강녕과 부(富), 곡식을 관장한다는 칠성신이었다. 그 내력담이 담긴 제주 ‘칠성본풀이’ 사설은 굿판에서 심방의 입으로 전승되고 있다.

  문득 할머니의 금기어가 생각났다.

  여름날은 뱀들이 활개치는 계절이었다. 고향 우영 모래밭에는 황구렁이들이 뒤엉겨 똬리를 틀곤 했다. 시도때도없이 마당, 장독대를 휘젓고 다녔다. 그럴 때는 내 가슴에도 뱀이 기어가는 전율이 일곤 했다.

  그런데 국민학교 일학년 여름방학 때인 제삿날이었다. 땡볕이 쏟아지는 한낮이었다. 상방 마룻바닥에 개구리처럼 엎드려 방학 숙제를 하는데 갑자기 제비들의 비명이 쏟아졌다. 고개를 쳐드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구렁이 한 마리가 제비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미 제비는 먹이를 입에 문 채 처마밑과 토담집 같은 둥지를 활공하며 째짹째짹 소리를 내질렀다. 까만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를 향한 원망의 눈총 같았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마당으로 나와 막대기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제비집으로 막대기를 추켜들었을 때였다.

  "수남아. 큰일난다."

  할머니가 등 뒤에서 다가서며 막대기를 빼앗았다. 새벽에 조밭 검질을 매러갔던 어머니, 작은고모도 뒤따라 들어섰다.

  "저기 뱀! 뱀!"

  나는 제비둥지에서 혀를 낼름거리는 뱀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침을 내뱉었다.

  "집을 지키는 영물인디 박접허민 큰일난다. 뱀신디 침 바끄곡(뱉고) 손가락질허민 셋바닥(혓바닥), 손가락 썩나."

  그 이유는 한참 세월이 흘러서야 깨단했다. 그리고 4․3의 광풍이 섬을 지배하던 시절, 수많은 혓바닥총질과 손가락총질 사건들을 떠올렸다.

  “이곳이 명승지로 탈바꿈되다니···.”

  피눈물, 피울음으로 피바다를 이뤘던 저주의 땅이라 했다. 노인회장이 창밖을 응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해 시월부터 대엿 해 동안은 휴교령이 내려져 수업이 중단되면서 군 주둔지가 된 학교는 인근 지역민들의 임시수용소가 됐어요. 교실은 군인 숙소였고 교장관사는 군인들이 철수한 뒤에도 한동안 임시지서로 사용됐고···.”

  9연대 부대가 학교에 주둔하면서 함덕리는 조천면 초토화 작전의 중심지가 됐다.

  “지금 관광지로 소문난 ‘동백동산’ 지경인 ‘선흘곶’도 인근 중산간 주민들의 은신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총살되고 휘발유로 불태워지기도 했어요. 더러는 학교로 끌고와서 취조받다가 총질되기도 했고···.”

  주민들의 은신처 동굴 이름들도 묻어나왔다. 반못굴, 목시물굴, 도틀굴, 대섭이굴, 밴뱅디굴…. 김시희 청년의 당시 주소는 대흘리인데 ‘번지 불상’이었다.

  9연대가 떠나고 이어 2연대가 학교를 점령했다.

  “앞에 보이는 백사장과 서우봉이 제주 똥돼지 같은 주민들의 밀도살장이었어요. 남자와 여자를 발가벗겨 희롱하는가 하면 눈에 밟히는 젊은 여자를 욕보이고 나서 총질을 하지 않나···.”

  노인회장은 잠시 침묵을 커피잔에 담았다. 입술에 묻은 갈색 포말이 묻어나왔다.

  “특히 박성내 사건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노인회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컵을 집었다.

  그해 겨울 2연대에 의해 백오십여 명이 집단학살된 유혈극이었다. 10대 후반 너댓 명 외에는 30대 남자였다.

  ‘박성내’는 조선시대부터 성내 주민의 생명수였던 ‘산짓내’와 이음동의어였다. 계곡이 지나는 지점의 주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아라리 지역에서는 ‘아랏내’, 이도리 지역에서는 ‘박성내(박석천)’, 산지천을 따라 바다로 나가는 일도리 지역에서는 ‘산짓내’라 불렀다. 한라산 골짜기에서 굽이굽이 흘러내린다 하여 구곡수(九曲水)라고도 했다.

  노인회장 육성이 계속 물이랑을 이뤘다.

  “그렇게 트럭으로 제주농업학교에 도착한 뒤에는 스리쿼터로 나눠 싣고 박성내로 이동한 후 뒷짐진 자세에서 철사로 결박하고 다시 열 사람씩 굴비 엮듯 하고서는 암벽 위에 세워 총질하며 건천으로 곤두박질친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는 거예요···.”

  그날 건천 시체더미에서 빠져나온 생존자의 기억이 생생한 현장 기록으로 남았다.

  “그날 그곳에서 형제가 이름을 빼앗긴 사람도 여럿 있어요. 그래서 대가 끊긴 집안도 있고···.”

  노인회장의 눈가에 이슬 같은 물기가 번졌다. 나는 식탁에 놓인 하얀 티슈를 뽑아 슬며시 내밀었다.

  “혹시 회장님 집안에도 그날···.”

  나는 선뜻 말을 맺지 못했다.

  “우리 셋아방, 말젯아방도 한날한시에 그곳에서 황천길로 동행해 총각귀신이 되는 바람에 족보의 좀벌레로 남았어요.”

  나는 입속에서 ‘총각귀신, 족보, 좀벌레’란 말을 곱씹었다. 또 다른 총각귀신을 불러들일 기회였다. 마음과 마음의 접점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죄책감이 앞섰다. 나는 서우봉께를 바라보며 술잔을 비웠다.

  노인회장의 전화통화가 끝났다.

  “실은 제 아버지도 2연대 병사였어요.”

  무의식중에 꺼낸 고백이었다. 가끔 술기운이 먹물처럼 심신으로 번질 때면 떠올리는 화두이기도 했다.

  “2연대 본부는 대전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노인회장의 동공이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저도 최근에야 제주에서도 모병한 사실을 알았어요.”

  제2연대는 제주에 주둔하자마자 제주북국민학교에 제주도신병교육대를 설치했다. 훈련소는 모슬포 옛 오무라병사였던 9연대 주둔지였다. 이듬해 3월 10일에는 12기생 160명이 입소했다. 제주읍 72명, 구좌면 50명, 한림면 19명 외에 애월면, 대정면, 중문면, 표선면 출신이었다. 아버지와 내 탯줄이 묻힌 곳은 구좌면 동한리였다. 아버지 전사통지서의 입대 연월일과 겹쳤다. 내가 태어나 두 달 가까이 됐을 무렵이었다. 내 출생일은 그해 1월 12일이거나 13일이다. ‘의귀리 전투’가 벌어지던 한밤중인 듯싶다. 할머니 기억은 무자년 음력 날짜였다. ‘이 밤광 저 밤 사이에 나와부난 섣달 열나흘날인지 보름날인지 몰르켜….’ 창문을 이불로 가려 등잔불빛을 차단하고 보리짚이 깔린 방에서 망아지처럼 태어났다. 어머니는 ‘너 때문에 죽단 살아났어.’ 하면서 할머니의 넋두리만 가슴속에 박혀 있다고 했다. ‘아이고, 이 어지러운 시국에 미싱거 허잰 세상에 나와신고···.’ 어머니는 겨우내 드러누워 산후조리를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내가 구구단을 익히기 전부터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4․3’ 이야기를 되풀이하곤 했다. ‘느네 아방은 면서기라신디 밤이 되민 왓샤왓샤 허는 통에 모슬포 훈련소에 지원했저···. 딱 한 번 휴가 나오란 피가 잘잘 나는 느만 잠깐 들여다보고 두어 시간 뒤에 돌아가난 그게 매기여···. 나만 두어 번 동네 사름들과 돌레떡 만들고 삶은 독세기 질구덕에 담안 말구루마로 신작로를 걸언 모슬포 훈련소에 멘회를 다녀왔저. 성내에서 하룻밤씩 묵으멍···.’ 제주섬의 끝과 끝의 대칭점에 위치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해 8월 중순 2연대 마지막 잔류 병력이 철수할 때 영원히 고향을 등졌다.

  잠시 자리를 떴던 노인회장이 돌아와 앉았다.

  “어느 전투에서 전사했나요.”

  “1950년 6월 25일 공공지구 전투에서요.”

  전사통지서 기재 내용이었다. 제주 어디에서 주둔했는지도 알 도리가 없다. 제주4․3 진압군으로 주둔했던 제9연대, 제2연대 병력의 실체도 여전히 군사 비밀로 남았다.

  “행불된 모양인데··· 형제는요?”

  “저 혼잡니다. 그런데 회장님, 김덕후 어르신을 뵐 수 없을까요.”

  “그분은 왜요?”

  노인회장이 의아한 눈초리로 반문했다. 나는 김시희 청년과의 기막힌 사연을 진솔하게 털어놨다.

  “집에 붙어 있으려나. 지금도 일손을 놓지 않은 양반이라서···.”

  노인회관에는 날씨 궂은날에나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노인회장은 이내 휴대폰을 닫았다.

  “나중에 연락해볼게요.”

  “연락처라도 알았으면 하는데요.”

  “그건 곤란해요.”

  개인정보보호법이 살아 있는 자끼리의 만남을 가로막는 차단기였다.

  “일단 기다려봐요.”

  노인회장이 선약이 있다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충일에는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다. 올해는 고향에 있는 충혼묘지 참배를 생략하기로 했다. 어차피 빗돌에 새겨진 ‘고정빈’ 이름 석 자였다. 신산공원 ‘6․25 참전 기념탑’ 받침대 벽면,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 들머리 ‘무명용사 명비’에도 고정빈 병사 이름이 있다. 구천을 헤매는 고혼이 철새 도래지에 둥지를 튼 한 마리 새로 환생했나 싶었다.

  오전 열 시, 1분 동안 묵념의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제주4·3평화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꽃집에 들러 꽃다발도 준비했다. 그리고 행방불명희생자 김시희 표석 앞에서 묵념을 마치고 위패봉안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정체불명의 청년 위패를 발견했다.

  ‘어제 미리 동작동 국립현충원 다녀왔어요.’

  아들이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며느리, 손주와 함께 찍은 동영상과 함께. 충혼탑 지하터널 같은 위패봉안실 배경이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조명 속에 꽃송이, 꽃다발, 꽃바구니가 즐비한 곳에 참배객들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유해를 찾지 못한 13만여 6·25 군경전사자들 이름이 어둠의 지하실 검은 대리석 벽에 박힌 곳이었다.

  “여보. 저녁 준빈 다 됐어요.”

  “수남아. 배고프다.”

  아내와 어머니가 빨리 추모제를 지내라고 재촉했다.

  “예, 예. 어머님.”

  나는 ‘현신공 계보’ 손질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칠순이 넘은 지금도 고향을 떠나던 시절의 어머니 아들로 남았다.

  저녁식사 때가 곧 추모 시간이었다.

  먼저 두 폭짜리 병풍으로 서재 진열장부터 가렸다. 그리고 젯자리를 펴고 차례상을 옮겼다. 작은 밥상에 술잔, 과일 쟁반 하나, 촛대 하나가 전부였다. 촛불을 켜 향을 피워 헌작하고 기도하듯 축문 묵독에 들어갔다.

 

  오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는 현충일

  집안 영가님네 추모일을 맞이해서

  돈지봉 동녘 기슭 동한리 4428-2번지에 자리잡은

  제주고씨 ○○○파 현신공계 종가묘지 유택에 영면허신

  증조부모님, 하르바님과 할마님을 비롯한 집안 후손들

  그리고 육이오 전쟁터에 청춘을 바쳐 영원히 불귀의 객이 된 아버지 영전에

  수남이가 후손들 이름으로 삼가 아뢰엄수다.

  당신님네 살아생전 시절처럼

  제물과 삼헌관을 갖춘 제례 격식 없이

  나 홀로 과일쟁반 하나에

  촛불 켜고 향 피워 단헌단작으로 음덕 기리며 명복을 빌엄시난

  언제나처럼 이승의 어둠을 걷어내는 해와 달, 별이 되영

  자손들 발길 굽어살피시어

  만사형통하고 발복하게 해줍서.

  단기 4356년 음력 4월 18일

  서기 2023년 6월 6일

 

  그리고 마지막 배례를 했다. 이어 어머니와 아내가 나란히 서서 합장한 몸짓으로 병풍을 마주하고 섰다. 10여 분 만에 추모 의식을 마쳤다. 추석, 설날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증조부모, 조부모 합제일, 그리고 아버지 생일이 제삿날이었다. 할머니 외에는 모두 족보 이름으로만 남은 피붙이였다. 내가 고희를 맞이하던 해부터 현충일을 추모일로 정했다. 내가 주제(主祭)하는 집안의 모든 영령들을 순국선열, 호국영령으로 삼기 시작했다. 민초들의 인신공양으로 세운 나라였다.

  나는 음복주를 마시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나, 김덕후란 사람이요.”

  묵직하고 느릿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겨울 들판의 깡마른 억새를 연상케 했다.

  “예, 선생님···.”

  “어허, 선생님이라. 내 청춘의 꿈도 선생이 되는 거였어요. 고 교수님처럼···.”

  인생 만년이 돼서야 난생처음 듣는 호칭이라 했다.

  “너무 충격적이라 선생님을 뵙고 이런저런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공통분모의 열쇳말까지 동원해 가며 설득했다. 내 증조모의 탯줄로 맺어진 혈육이나 다름없다, 할아버지와는 의붓형제, 우리 아버지와는 숙질간인 동갑내기 청년이다, 험한 세상의 광풍에 행방불명된 외로운 죽음이란 데에 힘을 줬다.

  “내가 대엿 살 때 일이고··· 선친도 시희 족은아방에 대해선 함구로 일관하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파묘하듯 김시희 이름 석 자를 족보에서 파내고 싶었다, 평생 빨갱이 족쇄를 차고 살았다는 신세타령도 곁들였다.

  “그런데 당시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에도 김시희 성함이 있더군요.”

  “···.”

  1949년 육칠월에 있었던 두 번째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천육백오십구 명에 끼어 있었다. 첫 군법회의는 전해 12월이었다. 모두 2천5백30명 명부(名簿)가 곧 명부(冥府)였다. 지금은 불법 군사재판으로 판명됐으니 살생부에 지나지 않았다. 제주에는 형무소가 없어 육지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다. 이들은 주로 옛 동척회사 주정공장에 수용됐다가 육지형무소로 끌려나갔다. 이 밖에도 제주농업학교, 일도2동 공회당, 용담리 수용소, 그리고 서귀포 정방폭포, 천지연 부근의 전분공장, 창고에도 임시수용소가 있었다.

  “혹시 언제, 어떻게 입산했는지···.”

  “그건 오직 그분만 알지 않겠소?”

  곧 통화를 끝내려는 어투였다.

  “제사는요?”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숙부님 생일이 기일인데···.”

  김덕후 노인이 신음 같은 숨결을 내쉬며 말문을 닫았다. 제삿날까지도 아버지와 닮은꼴이었다.

  “그날 제사에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아들에게 제사명절을 넘겨주면서 내 이름으로 축을 고해 지제(止祭)했어요.”

  총각귀신을 자식 대에까지 대물림할 수 없었다고 했다.

  “너무 부담스러워 말아요.”

  “···.”

  나는 다시 연락하겠다며 통화를 마쳤다.

  순간 내년 현충일 추모일 축문에는 또 한 분의 영령 이름도 포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증보판 ‘현신공 계보’에도 증조부모의 또 다른 양아들로 등재하기로 작정했다. 성씨는 생략하고 ‘時希(시희)-1929년 3월 20일 출생, 4․3 당시 행방불명’이라고. 한꺼번에 두 양아들을 족보에 올린다 한들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살아 있는 자들은 기록되지 않은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불콰한 얼굴로 아버지와 내 모교 ‘100년사’ 집필 준비에 들어갔다. 화젯거리가 더욱 풍성해질 듯싶었다. 우선 졸업앨범 같은 ‘제2연대 제주도주둔기’부터 꺼냈다. 한가운데 손금 같은 등고선으로 층층이 둘러싸인 제주섬이 박힌 검정 표지였다. 한참 사진첩을 훑어보고 나서 다시 속표지를 펼쳤다. 누렇게 빛바랜 지면에 버즘 같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화석이 된 아버지 육필을 응시했다. 만년필로 낙서하듯 휘갈긴 글씨였다. 아버지가 지상에 남긴 유언 같은 친필이었다.

 

  가거라 三八線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 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三八線을 헤맨다

 

  어쩌면 총을 든 아버지와 죽창을 든 청년 김시희가 한라산 기슭 어디에선가 적과 적으로 조우했는지도 모른다.

  메모를 마치고 다시 사진첩을 비닐 서류봉투에 넣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제주4·3평화재단에 기증해 상설전시관에 전시케 하고팠다. 두 청년을 기념(祈念)하는 정표로 남기고 싶었다. 두 청년의 ‘피 묻은 목숨값’이었다.

  열여드레 달이 밝았다. 혼돈의 세월에 파묻힌 초상(肖像) 같았다.

* '족보'는 제주4·3 당시 열아홉살에 행방불명된 김시희 청년의 고혼을 위령하는 뜻에서 쓴 작품이다.

맨 위

2025 여름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