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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우 소설 <돌담에 속삭이는>(현대문학,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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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를 보는 눈

김진철  jorsal@naver.com 

 

 

 

 

  1. 주술에 걸린 섬

 

  봄은 겨우내 잠들었던 꽃들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펴고 피어나는 시절이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을 구경하기 위한 상춘객들이 곳곳마다 북적댄다. 향긋한 봄의 정취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입가에선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제주섬의 봄은 사뭇 다르다. 매년 4월이 되면 제주섬은 경건한 슬픔으로 뒤덮인다. 4·3의 슬픔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생생한 기억으로 반복된다. 비단 사람들만이 아니다. 제주의 자연 곳곳에도 4월의 슬픔이 각인되어 있다. 제주의 바람, 오름, 해변 등등. 돌 하나, 풀 하나에 조차 아물지 않는 상흔이 녹아있다. 그래서 눈부시게 아름답기만한 제주섬의 경치를 감탄하는 것조차도 사치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제 4·3은 제주의 봄을 맞이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과거의 슬픔이 여전히 떠돌아다니는 섬. 그래서 작가는 제주를 “주술에 걸린 섬”이라 표현한다. 그렇다. 제주는 풀리지 못한 주술에 걸려 있다. 사실 4·3의 참상을 기억하는 일이 4월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계절에나 제주섬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렇기에 4·3의 주술은 언제, 어디서든 유효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물로 바쳐진 주술은 시공간을 넘어 아주 강력하게 제주섬에 퍼져있다.

 

  육지와 이 섬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위치한 별개의 행성 같았다. 자그마치 60년 전이라니! 육지 사람들에겐 이미 까맣게 잊힌 그 먼 과거의 시간이 이 섬에선 현재형처럼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섬. 주술에 걸린 죄수처럼 과거의 시간에 갇혀버린 섬. 타자의 망각에 의해 유폐된 섬…… (중략) 이 순간에도 섬 어디선가는 암매장된 유해를 찾는 작업이 이어지고, 60년이 지난 오늘도 혈육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수많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못 했다. (67-68쪽)

 

  소설 속 주인공 ‘한’은 2년 전 서울을 떠나 제주로 이주했다. 그는 제주 사람들의 4·3에 대한 집착을 이해하지 못한다. 수십 년 전 일어난 사건을 지금까지도 놓지 못하다니. 미래를 향해 바쁘게 달려가는 치열한 경쟁에 익숙한 그에게는 매년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려는 제주 사람들의 모습이 이질적인 공동체로 비춰졌으리라. 하지만 제주 사람들에게 4·3은 박제화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의 사건이다. 부모의 시신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 억울하게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 지금도 4·3의 주술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랫동안 제주를 떠났다가 돌아온 윤씨가 여전히 그날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해 겨울 우리는 한꺼번에 지옥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 지옥 한가운데서 온갖 악마들과 마주쳤지요. 그들은 순전히 재미로, 놀이로, 장난삼아 사람을 죽였어요…… (중략) 그날 이후, 내 눈에는 지옥과 이 세상이, 악마와 인간이 하나로 겹쳐 보여요.”(171쪽)

 

  당시 제주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지옥도 안에서 어찌할 수 없었던 나약한 인간이었다. 수십 년이 흘러도, 제주섬을 오래 떠나 있어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그 때의 강렬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고 문신처럼 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다. 외부의 폭력이 행한 강제적 공동체의 해체는 그들에게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빈자리를 남겼다. 제주 사람들이 매년 4·3을 기억하는 행위는 거세당한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이자, 그들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는 일임을 말이다. 그래서 제주의 슬픈 봄을 이해하려면 4·3을 만나야 한다.

 

 

  2. 아파하는 마음의 눈

 

  ‘한’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영화 속 초능력자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도 아니었지만 오직 그 만이 몽희네 가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개안이 되는 눈. 작가는 ‘한’이 겪었던 아픔을 이야기 한다.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바다 어딘가에 수장되어 버린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이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경험한 트라우마는 무의식에 각인되어 꿈속에서 시체로 찾아오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과 몽희네 가족의 죽음에 대한 공통된 경험은 서로 공명하여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당신도 바로 그런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아. 보이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눈.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눈. (중략) 혼자서 길을 걷다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 그건 십중팔구 특별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표식이야. (중략) 그제야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어. 아, 당신도 우리처럼 ‘아파하는 마음’이로구나. 우리는 서로가 똑같은 ‘아파하는 마음들’이구나. (63-64쪽)

 

  ‘한’은 4·3 당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알아갈수록 비현실적인 존재에 대해 점점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몽희, 몽구, 몽선. 세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된 이후 미지의 세계를 보는 눈은 완전히 개안한다. 작가는 이러한 ‘한’의 눈을 통해 과거의 기억에 묶여있는 희생자들을 현재 시점으로 끌어온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이승을 떠나지 못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4·3 때 희생된 수만에 이르는 영혼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작가는 그 해답을 제주의 자연에서 찾고 있다.

 

  그 섬엔 별보다도 많은 어린아이들의 슬픈 혼이 돌담 틈에 숨어 살고 있다. (중략) 돌담 속 슬픈 아이들의 혼은 그 섬 어디에나 있다. 유채꽃 흐드러진 올레길, 갯무꽃이며 메꽃이 깔린 해안가, 하늘을 가린 울창한 삼나무 숲, 동백꽃 점점이 붉은 남쪽 마을, 잡초, 엉클어진 중산의 폐촌들……. 그 어디를 가건, 당신은 그들의 슬픈 시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223-224쪽)

 

  언제부턴가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은 실존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있다. 그러나 끝을 알 수 없는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실제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아니, 지구 안에서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판단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제주의 신들이 그러했으리라. 과거 제주 사람들은 마을 한편에 자리잡은 돌에서, 거대한 나무에서 특별한 존재가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그 존재들이 마을을 지켜주는 신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 신들도 4·3을 목도하지는 않았을까. 작가는 당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 신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폭낭 할망은 혼자서 만날 엉엉 울기만 해. 밤에도 울고, 아침에도 울고, 잠을 자면서도 울어. 그래서 우리들끼리는 울보 할망이라고 부르지. (중략)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픈 거냐고 다시 물었더니, 60년 전에 너희들 같은 아이들이 너무나 많이 죽어서 슬프다고, 너무나 많아서 그게 몇 명인지 조차 셀 수가 없다고,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가지 이렇게 계속 울고 있는 거라고, 할망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어. (129-130쪽)

 

  제주의 마을마다 뿌리내리고 있던 폭낭. 그리고 폭낭에 자리한 신들.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는 폭낭 할망의 울음은 4·3 이후 인내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울음이기도 하다. 4·3에 대해 침묵해야 했던 오랜 시기동안 제주 사람들은 마음으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4·3의 경험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4·3을 경험한 윤씨, 잘려나간 신목, 폭낭 할망으로 상징되는 4·3에 대한 경험은 현실적 존재와 비현실적 존재 모두에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4·3을 바라본다. 사람 → 자연 → 신으로 이어지는 대상의 확장은 인간 중심의 한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세계 속에서의 4.3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3. 생명의 섬, 서천꽃밭섬

 

  얼마 전 일본의 작은 마을인 타이지에서 벌어진 고래 사냥의 뉴스가 전해졌다. 사람들은 전통이라는 미명아래 포경선으로 고래들을 해안가에 몰아넣고 작살로 사냥을 했다. 고래들은 점점 조여오는 그물 속에서 서로의 최후를 지켜봐야 했다. 몸부림 치고 있는 사진 속 고래들의 모습에서 70년 전 제주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족의 죽음을, 이웃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을 당시 사람들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더라도 이미 정신적 살해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주신화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되살릴 수 있는 뼈살이꽃, 살살이꽃, 숨살이꽃, 도환생꽃들이 자라는 서천꽃밭이라는 장소가 있다. 할락궁이, 녹디셍이, 자청비 등 제주의 신들은 서천꽃밭을 방문해 이 꽃들을 얻어다 자신들에게 소중한 죽은 이를 살렸다. 그래서 작가는 섬에 묶여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장소로 이승과 저승을 매개하는 서천꽃밭섬을 꿈꾼다. “한라산을 닮은 아이들과 꽃의 섬”. “아이와 어미의 혼을 구원”하는 생명의 섬으로 말이다.

  제주에서는 매년 4월이면 4·3의 현장에서 4·3의 희생자들을 위무하는 해원상생굿이 열린다. 해원상생굿이 열리는 장소는 짧은 시간이나마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이 소통할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한다. 바로 이 장소가 어쩌면 작가가 생각한 “저승의 경계선을 넘어 제주”로 찾아오는 서천꽃밭섬이 아닐까. 굿판이 벌어지는 동안 두 세계를 매개하는 것은 심방이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인 심방은 이승과 저승 모두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존재이다. 심방은 희생자와 생존들의 만남을 특별한 눈으로 인도하고 지켜본다. 소설 속 ‘한’은 심방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심방처럼 특별한 눈으로 몽희네 가족의 재회를 지켜본다. 우리는 ‘한’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 그들의 슬픔에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만일 당신이 언젠가 그 눈을 갖게 된다면, 당신은 그 순간부터 지상을 떠도는 수많은 불행한 혼들의 슬픔, 절망, 원망, 분노, 고통과 직접 마주쳐야만 해. 진정으로 두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을 때라야만, 당신은 그들의 검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검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검은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테니까…….(206쪽)

 

  주변을 둘러보자. 살짝 흔들리는 나뭇잎, 돌담의 구멍을 지나는 바람소리, 푸른 바다 파도의 포말에서 그들의 자취를 찾아보자. 만일 당신이 ‘한’과 같은 눈을 갖고 있다면 외로운 영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에 집중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사람으로 거듭나 보자. 그것이 “돌담에 속삭이는” 영혼들의 소리를 들은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길일테니 말이다.

 

-계간 『제주작가』 66호 수록

202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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