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물회
마지막 손님들이 테우에 올랐다. 순옥은 그중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왜소한 남학생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굵은 안경테 위를 덮은 덥수룩한 앞머리와 낡은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모습이 그즈음의 정우와 닮았다.
“여행들 왔나 봐요?”
순옥은 정우 닮은 남자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네. 어제 왔는데, 너무 좋네요. 하하하.”
정우 닮은 남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옆에 서 있는 여자도 함께 따라 웃었다. 고른 치아가 윤슬처럼 반짝였다.
“할머니, 이거 얼마나 걸려요?”
여자가 선체에 동여맨 굵은 밧줄을 만지며 물었다. 순옥은 여자 입에서 나온 할머니란 단어가 낯설었다. 갑자기 확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하긴 지난해에 일흔이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 위까지 갔다 내려오면 30분 정도요.”
순옥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한숨을 쉬고 해안가를 따라 드리워진 밧줄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순옥이 모는 테우는 포구 앞바다에서 어촌계사무실이 있는 방파제를 왕복했다. 선체 양쪽으로 맨 밧줄이 어촌계사무실 앞 계선주까지 이어져 있어 그곳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는 단순한 코스였다. 순옥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물살에 맞춰 노를 밀었다 당겼다.
“와아, 할머니. 테우 잘 모시네요. 오래 하셨어요?”
“한 오십 년 됐네요.”
“아아, 노을이다!”
여자가 순옥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갑자기 환호성을 질렀다. 수평선 가에서 시작된 노을의 향연을 발견한 것이었다. 여자의 탄성을 들은 일행들도 모두 하늘가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로 시선을 돌렸다. 순옥도 고개를 들어 노을이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에 떠 있는 태양의 주변에 붉은 테가 둘러지면서 하늘을 다홍빛으로 물들였다. 주변을 떠다니는 새털구름떼는 영롱한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순옥은 잠시 노 젓던 손을 멈췄다. 테우 위로 침묵이 흘러들었다. 선체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와 촘촘하게 이은 나무 바닥 틈새를 넘나드는 물의 숨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너울이 테우 밑을 지날 때마다 젖은 나무 밑창이 삐걱빼각 앓는 소리를 냈다. 순옥의 장화 위로 바닷물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테우는 긴 나무 토막을 결착해 만든 탓에 바닷물이 밑창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순옥은 발끝이 물에 젖는 것도 잊은 채, 두 눈을 살포시 감았다. 선체 밑바닥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울려 퍼지고, 순옥은 그 소리를 들이마시듯 음미했다.
순옥은 스무 살부터 테우를 탔다. 남편이 자리돔을 잡으면서 시작한 뱃일이었다. 동네 여자들은 직접 물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했지만, 순옥은 물질이 서툴러 물에 들어가는 대신 자리돔잡이를 따라다녔다. 그때만 해도 자리돔을 잡기에 테우만 한 배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워낙 가볍고 빠른 동력선들이 나와 테우로 자리돔을 잡는 일은 사라졌다. 지금처럼 관광객을 태우는 게 유일한 일거리가 되었다.
하늘을 불태울 듯 일렁이던 노을이 옅어지면서 서편 하늘가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순옥은 노를 고쳐 잡았다. 생각보다 많이 지체했다. 바다 위는 육지보다 어둠이 빨리 찾아왔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었다고 어촌계장한테 한 소리 들을 수 있었다. 순옥은 노을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손님들에게 상자리로 올라가 앉으라고 했다. 손님들이 상자리에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하고 순옥은 노를 힘껏 저었다. 파스를 세 개나 붙인 왼쪽 어깨가 쿡쿡 쑤셨다. 예전엔 바람을 가르듯 노를 저었지만, 칠순이 넘은 지금은 노를 몇 번 움직이지 않아도 어깨가 요란스레 반응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포구가 가까워지자 순옥은 노를 멈추고 포구에 매 놓은 홋줄을 잡아 당겼다. 테우가 자석에 끌려가듯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순옥은 계선주에 닿을 때까지 홋줄을 바짝 당겨 테우를 안전하게 정박하고 손님들이 내리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안경을 쓴 청년은 뒷모습까지도 정우를 닮아 있었다.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책이여. 아무 일도 어신 디 줄줄줄.’
순옥은 누가 볼까 얼른 눈물을 훔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정우를 닮은 청년을 본 탓인지 자꾸 정우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러면 또 눈물이 맺혔다. 순옥은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몸을 돌려 소금기가 허옇게 묻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숭시여. 숭시. 가이 간 지가 언젠디. 이츠룩 혼자 줄 줄이라.”
순옥은 스스로를 타박하며 집으로 향했다. 순옥의 집은 포구 맞은편에 나즈막한 어가들이 옹기종기 모인 골목 안쪽에 있었다. 지친 걸음으로 골목을 지나 대문 앞에 닿은 순옥은 깜짝 놀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텅 비어 캄캄해야 할 마당과 집이 환했다. 순옥은 불빛을 보니 왠지 불안했다. 어두워야 할 곳이 밝다는 것은 뭔가 평소와 다른 일이 생긴 거였다. 아무도 올 리 없는 집구석에 누군가 와 있고, 불을 켜고 순옥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순옥은 까닭 모를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순옥은 천천히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을 지나는 바람 끝에 짭조름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실려 왔다. 익숙한 냄새였다. 순옥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아아. 순옥은 짧은 탄식을 뱉었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순옥을 위해 이 음식을 만들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나자 순옥은 발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근 4년 만이었다. 처음 1년은 간간히 전화를 주고받았지만 근래 3년 동안은 문자조차 없었다. 내심 전화 한 통 없는 게 서운하면서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그냥 다 잊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한참을 마당 한복판에 멈춰 서 있던 순옥은, 결국 마음을 다잡고 헛기침을 세 번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간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집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흐흠! 흠, 흠.”
순옥은 조금 더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현관문 안쪽에서 그림자가 어룽거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머니.”
열린 문틈으로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순옥이 예상했던 대로 서연이었다. 소식도 없이 내려온 서연을 보고 순옥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당에서 들기름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서연이 집 안에 있을 거라는 걸 예상했으면서도 막상 얼굴을 보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둠처럼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포구 쪽에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등이 시렸다. 한기를 느낀 순옥은 서연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서연이 살짝 뒤로 물러서며 그녀를 맞았다. 문턱을 넘자 익숙한 바다 냄새가 포근하게 코를 감쌌다.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향이었다. 들기름으로 볶은 갱이로 끓인 국에서 나는 냄새였다. 앞바다에서 잡은 갱이를 들기름에 볶다가 미역을 한 움큼 넣고 끓인 국을 순옥은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은 들기름보다 참기름을 넣어야 더 고소하다고 하지만 순옥은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그대로 들기름을 넣은 게 훨씬 맛있었다. 그걸 잊지 않고 서연이 똑같은 방식으로 갱이국을 끓인 모양이었다.
식탁 앞에서 순옥은 서연의 볼록한 배를 보았다. 놀란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슬쩍 시선을 돌렸다. 순옥은 갱이국을 한 수저 떠 넣었다.
“맛있구나.”
익숙한 들기름 향과 바다 내음이 입 안 가득 번졌지만, 정작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밥을 떠 넣어도 목을 넘기기 어려웠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것만 먹다가 처음으로 끓이려니 어렵더라고요.”
밥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서연은 쉽게 입이 떼지지 않았다. 서연은 입을 굳게 다물고 식사에 몰두하는 순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지 못한 사이 순옥은 살이 빠지고 흰머리가 늘어 있었다. 예전에는 검게 염색을 했었는데, 염색을 안 한 지 오래됐는지 머리 전체가 완전히 백발이었다. 순옥의 양쪽 눈가에 깊게 주름이 패고, 하관에 살이 빠져 밥을 먹을 때마다 턱 아래 주름이 자글거렸다. 서연은 많이 늙고 작아진 순옥을 보자 콧날이 시큰했다. 서연은 얼른 고개를 숙여 감정을 추슬렀다.
“어떤 영 갑자기 와져니?”
식사를 마친 순옥이 서연에게 물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 대놓고 묻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도 행여 서연이 상처받을까 말투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어머니, 저, 저, 제주도에서 당분간 지내려고요. 제가 집 구할 때까지만 어머니 집에 있어도 괜찮을까요?”
순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빗은 정수리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흰머리 몇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서연도 흰머리가 올라올 나이가 된 것이다.
“하아...”
순옥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게매... 무슨 일이 있기는 허구나. 알았쪄.”
순옥은 옥수수 알을 골라내듯 천천히 말을 뱉었다. 서연이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가 섞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때까지 잔뜩 굳어 있던 서연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서연이 설거지를 하는 사이, 순옥은 서연의 잠자리를 준비해 주기 위해 정우가 옛날에 쓰던 방문을 열었다. 전등을 켜자 창문 앞에 놓인 커다란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정우가 대학교 때 장만한 밤색 나무 책상 위에 낡은 노트북이 놓여 있고, 그 옆에 다섯 칸짜리 책장이 세워져 있었다. 책장에는 정우가 하도 끼고 다녀 허옇게 표지가 벗겨진 수험서와 문제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수험서 책등에 제작년도가 큼지막하게 적혔는데, 가장 최근이 14년 전이었다. 그 해에 정우는 입사 시험에 합격했고, 서연과 결혼했다.
순옥은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던 정우의 눈빛이 지금도 선했다. 차례를 지내러 큰집을 다녀온 정우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들어와서는 대뜸 결혼하겠다고 했다.
“겨... 결혼? 어... 언제?”
순옥은 아들의 갑작스러운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최대한 빨리요!”
정우는 크게 외치고 멋쩍게 웃었다. 한껏 벌어진 입술 새로 잇몸이 만개한 모습을 보자 순옥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대고 양손이 떨렸다. 순옥은 목소리가 떨려 나올까 봐 아무 말 못하고 양손을 가슴 위에서 그러쥐었다. 기분이 묘했다. 자신이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순옥은 그때처럼 떨리는 손으로 옷장에서 이부자리를 꺼냈다. 설거지를 마친 서연이 정우 방으로 들어왔다. 서연은 문턱을 넘기 전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도 방은 4년 전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그곳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서연은 방 가운데에 요를 깔고 그 위에 이불을 펼치는 순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휑해진 순옥의 정수리에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반사됐다. 서연은 시간이 멈춘 방에서 홀로 늙어가는 순옥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쫌만 이시믄 뜨셔질 거여.”
“네, 어머니... 고맙습니다.”
서연은 고맙다는 말을 할 때마다 목이 메는 것 같아 숨을 한번 골랐다. 방을 나가던 순옥의 시선이 서연의 배에 머물렀다. 서연이 습관처럼 양손으로 배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내일 저녁은 나가 준비하마. 먹고 싶은 거 이시면 고르라.”
“아니에요. 어머니.”
서연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알았쪄. 생각나면 편허게 고르라. 겅하고 얼마가 됐든 이실 동안은 편히 시라.”
순옥은 서연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어머니... 저... 자리물회는 한번 먹고 싶어요.”
서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순옥이 놀라서 움찔했다. 순옥의 어깨가 담이 온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자리? 자리는 아직... 철이 일러서... 나중에... 나중에 하켜... 게믄... 편히...”
순옥은 말끝을 흐리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순옥은 고개를 돌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서연은 꼿꼿하게 굳은 순옥의 등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긴장과 불편함이 온몸에 서려 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정말 어머니한테 못할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서연은 순옥에게 오기까지 수백번을 물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거였다. 어머니 앞에선 언제나 잘 지내는 척, 괜찮은 척 하고 싶었다. 무너지거나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갈 곳이 없었다.
서연이 누운 방에서 불이 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순옥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순옥과 살겠다며 가기 싫다는 서연을 매몰차게 독립하라고 보낸 게 4년 전이었다. 그저 잘 살기만을 기도하고 바랬는데, 저런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볼살이 빠져 광대뼈가 드러난 서연은 4년이 아니라 10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게다가 서연은 홀몸이 아니었다. 정우와 10년을 살았을 때도 생기지 않던 아기였다. 더 놀라운 것은 저런 만삭의 여자를 이런 곳으로 내몬 남자를 만났다는 거다. 오죽 갈 데가 없으면 저런 몰골로 여길 왔을까를 생각하면 오장이 다 뒤틀렸다. 하지만 정작 서연이 자신보다 몇십 배는 더 힘들 거여서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이런 꼴이 다 뭐냐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자리물회라니!’
서연의 입에서 자리물회란 말이 나왔을 때는 정말 버럭 화를 내고 싶었다. 그걸 참느라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꼬집다시피 세게 눌렀다.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 손바닥에 피멍이 맺힐 정도였다.
자리물회는 정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서울에서는 절대 이 맛이 나지 않는다며 집에 올 때마다 자리물회를 해달라고 졸랐었다. 그렇게 정우가 좋아하는 자리물회를 정우가 가고 나니 차마 만들 수 없었다. 자리물회를 만드는 동안에도, 먹는 동안에도 정우가 생각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지난 4년 동안 자리돔을 잡지도 팔지도 않았다. 그런 순옥에게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리물회가 먹고 싶다니. 아무리 서연이라 해도 서운함이 치밀어 올랐다. 서연이는 정말 정우를 완전히 잊은 걸까.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몸을 하고 예까지 올 순 없었을 것이다. 순옥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순옥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절대 자리물회를 만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울먹였다.
불을 끄고 누운 지 한참이 지나도록 서연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덮고 있는 이불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마음이 심란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정우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순옥이 이불을 한 번도 꺼내 빨지 않았다 해도 어쩌다 명절 때나 와서 덮던 이불에 그의 냄새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서연은 턱밑에 닿은 이불을 코까지 끌어당겨 냄새를 맡게 됐다. 정우 냄새. 정우와 제주에 오면 항상 맡게 되던 냄새. 어쩌면 정우의 냄새가 아니라 이곳의 냄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서연은 정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았다. 만약 정우의 흔적이 없었다면 절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거였다.
서연은 순옥이 정우의 흔적을 없애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우가 가고 난 후 4년 동안 타지에 살면서도 자주 이곳에 내려왔다. 순옥의 앞에 나설 자신이 없어 문 앞을 맴돌다 먼발치에서 테우를 모는 순옥의 뒷모습을 숨어 보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곤 했다. 아마 뱃속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순옥의 앞에 나타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아침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도 얼마나 망설였는지. 다시 서울로 돌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가려 할 때마다 서연에게 말을 건네듯 뱃속의 아이가 꿈틀댔고 결국 서연은 순옥이 사는 이곳으로 오고 말았다.
택시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오는 데, 마을 앞에서 넘실대는 파란 바닷물이 그대로 밀려와 몸을 덮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길을 멈추면, 여기서 조금만 앞으로 발을 뻗으면 그대로 바다와 한 몸이 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이런 몸으로 순옥을 만날 생각을 하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번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 뿐이었다. 아이를 살리려면 서연은 이곳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서연, 힘을 내자.’
서연은 주문처럼 말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뱃속에서 아이가 꿈틀거렸다. 아. 제법 세게 걷어 찬 아이의 발길질에 비명이 새어 나왔다. 서연은 둥글게 몸을 말아 양손으로 배를 감쌌다. 아이의 발길질이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아, 아파. 아프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서연의 입은 환하게 벌어졌다. 엄마가 잘못했어. 이상한 생각 안 할게. 서연은 배를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독한 년, 고얀 년.”
순옥은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욕을 퍼부었다. 댓바람부터 급하게 나오느라 잠바를 챙겨 입지 못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새벽바람이 선뜩했다. 순옥은 드러난 팔뚝을 문지르며 포구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좋은 놈을 고르려면 첫 마수를 봐야 했다.
서연이 입맛이 없다며 며칠째 통 음식을 먹지 못했다. 지난밤에는 열이 펄펄 끓어 냉찜질을 해서 겨우 내렸다. 임산부라서 약을 먹일 수도 없는 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모습에 순옥은 어쩔 수 없이 서연이 먹고 싶다던 자리물회를 만들기로 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보면 그래도 넘길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마음으로 나섰으면서도 순옥의 얼굴은 쓰다 버린 호일처럼 구겨진 채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남의 자식을 가진 몸으로 여길 기어 들어올 생각을 했는지. 순옥은 죽는 순간까지도 지 각시 걱정에 눈을 감지 못하고 간 정우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솟구쳤다. 원래 죽은 놈만 억울한 거다. 저런 년인 줄도 모르고. 순옥은 종주먹으로 체한 것처럼 뻐근한 가슴께를 쳤다.
포구에 도착하자 지난밤에 잡은 자리돔을 파는 장사꾼들로 시끌벅적했다. 순옥을 알아본 동네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순옥은 좌판에 벌여 놓은 자리돔을 살폈다. 자리돔은 크기별로 구분되어 여러 색깔의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가장 큰 자리돔은 구이나 조림으로, 중간 크기의 자리돔은 강회나 물회로, 가장 작은 자리돔은 젓갈용이었다. 날씨 탓에 평소보다 적은 양이지만 그래도 갓 잡은 녀석들이라 싱싱했다.
그중 눈알이 맑고 살이 연해 보이는 것으로 한 됫박 샀다. 둘이 먹기엔 많은 양이었지만, 남은 녀석은 손질해 냉동해 두면 다음에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자리돔을 사고 나자 더 할 일이 없는데도 순옥은 괜히 포구를 돌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자릿배들이 작업을 마치고 자리돔을 팔던 아낙들이 모두 들어가고 난 뒤에도 순옥은 몇 번이나 포구와 방파제 사이를 느리게 걸었다.
어느덧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핼쑥한 서연의 얼굴이 떠올라 결국 집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지금 가서 자리 손질하고 국물 만들면 저녁에나 먹을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발목에 추를 매단 듯 걸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동네 어귀를 지나 겨우 집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현관 앞에 낯선 남자 셋이 서 있었다. 남자들은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현관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검정색 마의에 정장 바지를 입은 모습이 동네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거 누구요?”
순옥이 남자들에게 물었다. 긴장한 탓에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남자들이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붉게 충혈되고 날카로운 눈빛이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분 좋은 일로 찾아온 게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순옥은 검은 비닐봉지를 든 손에 잔뜩 힘을 주고 목청을 높였다.
“여긴 나 집인데 누구냐고요!”
순옥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옆집 창문이 열리고 이웃집 남자가 머리를 내밀었다.
“순옥이 삼촌, 무슨 일 이수과?”
이웃집 남자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남자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눈짓을 교환했다.
“아... 잘못 들어온 모양입니다.”
가장 덩치 큰 남자가 현관에 붙였던 몸을 떼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나머지 두 남자도 덩치 큰 남자를 따라 했다. 그러나 잘못 들어왔다는 말과 달리 남자들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사과도 하지 않고 꼿꼿한 걸음으로 바람소리를 내며 순옥의 옆을 지나갔다.
남자들이 골목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순옥은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 서연이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하얗게 질린 서연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순옥은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싱크대에 던지고 서연에게 다가갔다.
“나... 이제는 들어사켜. 여태 말해주길 기다리멍 벙어리처럼 이서신디. 더 이상은 안되켜. 이 집에 더 이실거믄 다 고르라.”
순옥은 서연을 앞에 앉히고 단호하게 물었다. 서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옥은 서연이 울도록 가만 놔두었다. 서연은 한참을 꺼이꺼이 소리까지 내며 울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쌓아 둔 게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지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한참을 울다 그친 서연은 사과부터 했다.
“죄송할 건 없고 대체 무슨 일인지나 고르라.”
순옥은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재촉했다. 그러나 서연은 눈물을 그치고도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니 뱃속의 아기랑 관계이시냐. 혹시 아까 그 남자가 아기 아방이가?”
순옥이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아니에요.”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 그럼 누게라?”
“아기... 아빠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기 아방이? 무사 아기 아방이 너한테 그런 깡패를 보낸단 말이고?”
순옥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기 아빠란 작자가 험악한 깡패를 사주해 보낼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터였다. 순옥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가... 그 사람을 고소했어요. 지금 재판 중인데...”
“뭐? 고소? 무... 무신 일로?”
순옥은 너무 놀라 숨 쉬기가 벅찰 정도였다.
“그 사람이... 저를... 저를 강간했어요.”
순옥의 가슴이 요란한 소릴 내며 내려앉았다.
“그런데, 재판 전에 합의해 달라고 협박하고... 그래서 여기로 도망 왔는데... 사람을 보내서... 여긴 안전할 줄 알고... 어머니께 염치없는 걸 알면서도...”
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순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기 아빠가 강간범이고 재판 중이라니. 그렇다면 서연의 뱃속에 있는 아기는 강간범의... 순옥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둠이 찾아왔다. 서연은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풀을 잘 먹인 이불청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서연은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연은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나직한 풀벌레 소리와 함께 희미한 귤꽃향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귤꽃향 끝에 갯내가 살짝 느껴졌다. 귤꽃과 갯내. 이곳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서울 사는 내내 얼마나 이 냄새를 그리워했던가. 서연은 두 눈을 감고 냄새를 천천히 음미했다. 서연의 말을 들은 뒤 순옥은 아무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충격이 아주 큰 것 같았다. 순옥의 뒷모습이 곧 쓰러질 듯 허청거렸다. 얼마나 큰 충격일지 서연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역시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달리 갈 곳이 없었다. 고아인 서연에게는 정우와 순옥이 전부였다. 어딘가에 먼 친척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전화 통화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정우가 없는 지금엔 순옥뿐이었다. 순옥이 옆을 떠나 서울로 올라올 때도 순옥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평생 정우를 대신해 어머니로 모실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둥대며 살다 보니 연락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다 불쑥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고 말았다. 아무 말이 없었지만 서연을 보던 날 순옥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서연은 가슴이 칼에 찔린 듯 아팠다. 차라리 그때 바로 떠났어야 했을까? 편히 있으란 말에 고마워 눌러앉은 게 결국 이런 모습까지 보여 줬다. 모든 걸 정리하고 밝은 모습으로 순옥에게 털어놓고 싶었는데. 모든 게 너무나 더디고 느렸다. 이렇게 지난하고 힘들 줄 알았으면 고소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더는 그 파렴치한 얼굴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기를 함부로 다루는 그 태도는. 서연은 자신과 아기의 인생에서 그 사람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우고 싶었다.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날 밤 자체를 송두리째 지워 버리고 싶었다.
3년을 계약직으로 버틴 끝에 정직원이 되어 처음으로 참여한 연수였다. 2박3일로 예정된 연수 첫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같은 팀원끼리 술자리를 가졌다. 연수원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맥주 한잔하자고 시작한 술자리가 점점 길어지더니 급기야 객실로 이동해 새벽까지 이어졌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배달음식이 오지 않아 막내인 서연과 동기가 연수원 로비의 편의점을 여러 차례 왕래하며 술과 안주를 날랐다.
회사와 집을 벗어났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좀처럼 술자리는 끝날 생각을 않고, 더 이상 졸음을 견디지 못한 서연이 홀로 술자리를 빠져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부터 출발해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빠졌던 서연은 갑자기 숨이 막혀 눈을 떴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팀장과 마주쳤다. 서연은 몸을 뒤틀며 반항했지만, 고팀장은 아무렇지 않게 서연의 입을 틀어막고 속옷을 찢었다.
“나 때문에 승진한 거 알면서 왜 이래...”
어떻게든 소리를 내 보려 애쓰는 서연의 귀에 속삭였다.
“너도 원하잖아.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알지..”
고팀장 입에서 시궁창처럼 기분 나쁜 술냄새가 풍겼다. 욕심을 채운 고팀장이 나가고 서연은 전화기를 꺼내 신고하려다 멈추고 엉엉 울었다. 자신이 신고해 경찰이 출동하면 연수원이 발칵 뒤집힐 게 뻔했다. 서연은 한참을 고민했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서연은 연수가 끝나는 날 시내에 돌아가는 대로 신고를 하기로 생각을 고쳤다. 서연은 휴대폰을 꺼내 시뻘겋게 멍든 허벅지와 목을 찍고 침대 시트를 걷어 찢어진 속옷과 함께 봉지에 넣었다. 그리곤 욕실에 들어가 물을 틀고 고팀장의 손이 닿았던 몸 구석구석을 때수건으로 박박 밀었다.
남은 연수 기간 동안 다시 당할까 두려워 고팀장이 있는 곳은 일부러 피해 다녔다. 마침내 연수가 끝나는 날, 서연은 귀가하는 길에 바로 경찰서로 가서 성폭행 신고를 했다. 배정된 여성 경찰관과 경찰서 근처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담담한 어조로 거친 성관계의 흔적 혹은 강제로 삽입한 흔적으로 보이는 상처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당한 직후 신고를 바로 하지 않은 게 큰 잘못일 거라는 생각은 크게 하지 못했다.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진술을 반복하고 휴대폰에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경찰의 사건 조사는 더디기만 했다.
사건을 접수한 후, 회사에서 서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았다. 서연은 고팀장을 협박하는 꽃뱀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팀장은 사람들 앞에서 일방적인 폭행이 아니라 서로 합의해 가진 관계라고 주장했다. 경찰에게도 고팀장은 서연이 직접 열쇠를 건네주어 방으로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경찰서에서 확인한 CCTV 영상에 고팀장이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서연의 방문을 여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고장의 말대로라면 서연이 그 열쇠를 직접 건넸다는 거였다. 하지만 고팀장의 주장과 달리 서연은 카드키를 팀장에게 건네준 적이 없었다. 카드키를 둘러싼 진위를 파헤치는 탐문 수사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고팀장의 회유와 협박이 시작됐다. 고팀장은 출퇴근 시간에 맞춰 서연의 집 앞에서 창문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고, 밤새 전화와 문자를 반복했다. 서연은 고팀장이 당장이라도 서연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올 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한순간도 편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서연은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이사 갈 집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 현기증이 일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신경성이려니 하면서도 약을 처방 받으러 병원에 들렸다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료 모니터에 자궁에 자리잡은 지 5개월이 지나 눈, 코, 입이 선명하게 보이는 아이의 몸이 하얗게 찍혀 있었다. 서연은 눈코입이 선명한 그 아이를 차마 낙태시킬 수 없었다. 의사는 중절수술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화면에 또렷이 살아 있는 아이를 지우는 건 살인인 것 같았다.
정우와 함께 할 때 그렇게 갖고 싶던 아기를 왜 이런 방법으로야 가지게 되었는지. 낙태를 몇 번이나 고민하고 의사와 상담한 끝에 서연은 결국 낳기로 결심했다.
서연이 아기를 낳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고팀장은 더 집요하게 고소를 취하하라고 졸랐다. 합의금을 주는 것은 물론, 성인이 될 때까지 일정액을 양육비로 주겠다며 회유했다. 고소만 취하해 달라는 것이었다. 서연이 거절하자 팀장은 서연을 맞고소했다. 자신의 돈과 직위를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었다. 아기 또한 일부러 돈 때문에 가졌다고 소문을 냈다. 발신번호가 없는 악성문자가 종일 날아오고 서연의 사진과 신상이 떠돌아다녔다. 서연은 차곡차곡 모아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했지만, 그 또한 진행이 너무 더뎠다. 고소당한 계정이 막히면 새 계정에서 이전과 비슷한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서연마저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 부모형제 없는 서연이 유일하게 안심하게 숨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순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팀장의 집요하고 더러운 손길은 이곳에까지 뻗쳤다. 서연은 자신이 떠나는 것이 순옥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떠나야 더 이상 순옥을 괴롭히는 게 없을 거였다. 서연은 태동이 느껴지는 배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서연은 두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눈물이 얼굴 위를 흘러내렸다.
가방을 꾸리고도 며칠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순옥은 뭐가 바쁜지 서연이 깨기 전에 집을 나가 저녁 늦게야 들어왔다. 테우를 모는 일도 쉬는 눈치였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써 외출을 했는지 순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같은 장소에 있는 게 불편해서 피하는 걸까? 서연은 순옥이 돌아오면 떠나겠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집 안에 어스름한 기운이 번지도록 순옥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연은 저녁도 먹지 않고 순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전에 변호사로부터 재판 기일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마음이 더 급했다. 기일을 통보받은 고팀장이 더 집요하게 찾아올 지 모를 일이었다. 급한 대로 시내에 있는 미혼모 보호 시설에 신청을 했다. 아기를 낳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오래 있지는 못할 거였다. 서연은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 때, 현관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얼굴이 상기된 순옥이 들어오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서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안 잔?”
순옥은 서연이 당연히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며 검은 비닐봉지를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어머니, 저...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서연의 입에서 다른 곳이란 말이 나오자 순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무신 말이니!, 그 몸으로 어딜 간단 말이니!”
“여기 있으면 또 그쪽에서 찾아와서 그때처럼..”
“됐쪄!! 그런 일 어실 거여!”
“네에?”
단언하는 순옥의 기세에 영문을 몰라 서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나가 그 접근금지인지 뭔가 신청하고 왔쪄. 니한테도 말하젠 해신디 옆집 아들이 경찰이라 나 거기 아방한테 부탁해서 직접 경찰서 가서 신청하고 왔쪄. 이제 그것들이 여길 올 일은 없쪄!”
서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동안 화가 나서 말을 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자신 때문에 경찰서를 다녀왔다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지 마라. 아기한테 안 좋은다. 옆집에 CCTV 이서 거네 그날 그놈들 다 찍혀서라. 그래서 그거 보여주면서 접근금지 신청하난 됐쪄. 그리고, 거기 아들이 신경 써서 순찰도 돌아 주켄 했쪄. 넌 걱정 말고 여기서 아기 낳을 생각이나 허라.”
순옥의 말이 끝나자, 서연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꼭 끌어안은 순옥의 품에서 서연의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희미한 새벽빛이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청회색의 어스름에 갇힌 집안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순옥은 맨발로 조심스럽게 부엌 바닥을 디뎠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자리돔이 담긴 스테인리스 그릇을 꺼냈다. 박선주 아내에게 특별히 부탁해 받아온 자리돔은 금방이라도 바다로 헤엄쳐 들어갈 것처럼 싱싱했다.
‘아무렴 누가 먹을 건데.’
싱싱한 자리돔을 바라보는 순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순옥은 자리돔의 비늘을 꼼꼼히 긁어내고 지느러미를 가위로 잘랐다. 잘 먹지 않는 머리는 등에서 배 쪽으로 비스듬히 잘라버리고 뱃속을 칼로 긁어냈다. 내장과 비늘이 깨끗이 제거되어야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손질이 끝난 자리돔을 물에 헹구고 반으로 나누어 뼈째 얇게 썰었다. 출산을 앞둔 서연이 먹을 것이기에 순옥은 억센 뼈가 남아있지 않게 칼등을 세워 최대한 얇고 깊게 썰었다. 남은 절반의 자리돔은 칼로 다졌다. 그렇게 섞어 넣으면 국물을 떠먹을 때 식감이 훨씬 쫄깃하고 감칠맛이 났다.
커다란 양푼을 꺼내 자리돔을 담고 사과식초, 고추장, 된장, 설탕, 매실청, 과 고춧가루를 넣어 골고루 비볐다.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 식혀둔 육수를 꺼내 양념이 잘 스며든 횟감 위에 부었다. 마지막으로 순옥은 집에서 담근 된장을 육수에 풀어 넣었다. 젓가락으로 된장이 잘 풀어지도록 젓는 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어느새 서연이 등 뒤에 서 있었다.
“어머니, 날 밝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더 주무시지 않고요.”
순옥은 계속 된장을 풀며 말했다.
“네가 먹고 싶다며.”
그 말에 서연이 얼굴을 붉혔다.
“아니다. 아기가 먹고 싶은 거지.”
순옥이 장난스레 말했다. 서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금방 될 거난, 편하게 앉아 이시라.”
서연은 식탁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순옥이 조리대에서 자리물회 만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우가 있을 때에 자주 보던 광경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올 적마다 순옥은 새벽 포구에서 사 온 싱싱한 자리돔으로 물회를 만들었다. 순옥이 만드는 자리물회는 서울에서 먹는 것과는 맛이 달랐다. 순옥은 제주 집된장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하는 데, 서연이 보기엔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서연은 그 맛이 정말 오랫동안 그리웠었다.
“서연아, 간 봐보라.”
순옥이 자리물회를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서연에게 내밀었다. 서연은 입을 쑥 내밀어 받아먹고는 말했다.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긴가? 나 입엔 좀 심심헌디.”
순옥은 완성된 자리물회를 한 대접 가득 떠서 서연의 앞에 내 놓았다.
“싱싱헐 때 먹으라.”
“네. 어머니도 드세요.”
“겅허카.”
순옥은 자리물회 한 대접을 더 떠서 서연과 마주 앉았다. 아침 햇살이 창밖으로 하얗게 번졌다. 햇살이 닿은 식탁은 황금빛으로 반짝였고, 자리물회 속 얼음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