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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에 벽
한 사내가 얼룩진 집의 벽에 페인트칠했다
노래를 부르고 비엔나소시지를 껌처럼 씹으며 페인트칠했다
비가 내리는 날에 칠했다
페인트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장 자연스러운 추상화를 그려 넣고 싶었다
빗방울이 벽 모서리를 미끄러지며 내리고 위태롭게 사라졌다
벽에는 꽃이 피고 열매가 달렸다
지나가던 댄서가 고대 시대의 오래된 춤동작을 그려 넣었다
벽이 흐물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다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벽은 가장 투명한 모습을 가진 바다이다
벽에는 고생대에 살았던 물고기들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벽은 벽을 허물고 벽은 벽을 집어삼키고
벽은 벽을 밀어내고 벽은 벽을 사랑하고
벽은 벽과 이별하고
비 오는 날에 벽은 벽을 지우고 벽 위에 벽이 쌓였다
벽 속에는 아름다운 달빛이 고여있다
가끔 눈보라가 벽의 중심에 몰아쳤고
아이들은 눈뭉치를 벽에 힘껏 던진다
나는 내 슬픈 기억을 조심스럽게 새겨넣었다
벽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한 권의 책이 된다
눈 없는 아이들이 반딧불처럼 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다
책 속에 거미줄을 그려 넣은 거미들이 책벌레처럼 웅성거리기도 했다
나는 물구나무서서 벽에 누워 깊은 잠을 잔다
가끔 유령들이 벽 속에 들어와 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강동완 kangdw0826@naver.com
이호석 ㅣ 공중 필사
2025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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