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마리아
2007년 3월 17일, 나의 결혼식이 있던 날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결혼식을 치르기 며칠 전 나는 남편과 함께 남편의 고향이자 예식장소로 정한 교회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의 하늘은 서울의 하늘에 비해 엷고 투명하면서도 흐릿해 보였다. 결혼식 전날 밤에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할 새신부임에도 불구하고 9시도 채 되기 전에 잠이 들었는데, 시댁의 오래된 아파트의 실외복도에 면한 작은 방의 침대에서 잠에 깊게 빠진 것과는 별개로, 그날 오후부터 시작된 강한 꽃샘바람이 밤새 침대 맡의 창문을 요란하게 흔드는 소리를 나는 잠속에서도 선명하게 듣고 있었다.
밤새 창문을 두드리던 바람소리는 새벽이 되자 잠잠해졌다. 남편과 나는 예식 화장을 하기 위해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어둠이 반쯤 걷힌 진청색 하늘 아래 공기가 제법 차고 매웠다. 우리는 마치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험생들처럼 긴장감에 가득 찬 얼굴로 긴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때 아닌 기습추위에 미용실에서는 가스스토브를 잔뜩 틀어놓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거울 앞에 앉아 더운 공기와 뒤섞인 진한 화장품 냄새를 맡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신부화장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엄마가 미용실에 도착했다. 엄마는 새벽 일찍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가서 그 앞에서 출발하는 두 대의 관광버스에 전날에 옮겨둔 음료와 떡, 머리고기 등을 나누어 실어 보낸 뒤에 다시 서울역으로 달려가 KTX를 타고 두 시간 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그 과정을 설명하는 엄마의 표정이 꽤 상기되어 있었다. 엄마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 화장과 머리손질을 받고 자색과 분홍색이 섞인 한복으로 갈아입은 후, 서울에서 출발했던 관광버스를 맞이하기 위해 다시 서둘러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교회는 큰 도로와 인접한 골목의 주택가에 있는 칠백여 명의 신도를 가진 중형교회였다. 이곳에서 시어머니가 권사 직분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예식장소로 정해진 데에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교회라는 의미가 가장 컸다. 첨탑이 높이 솟은 교회는 크고 무거운 목재 현관문이 달린 오래된 건축물이었다.
예배당 입구 옆에 붙어 있는 크고 넓은 방이 신부대기실로 사용되었다. 가구 하나 놓여 있지 않은 방에는 짙은 색의 나무마루가 깔려 있었으며 한쪽 벽면 전체에 전면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에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덩그러니 놓고 앉아 바깥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이 모든 과정들이 나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작 나의 친구들은 시간이 한가한 몇몇 외에는 거의 내려오지 못한 것에 조금 쓸쓸해졌다.
예식을 치르기 위해 예배당 입구에 들어서자 첫째 작은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던 그의 얼굴엔 병색이 아직 남아 있었다. 게다가 고급스러운 양복과 대비되어 오히려 더 늙어보였다. 작은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나의 결혼식 전까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첫째 작은아버지로부터 “정현이 결혼식에 내가 손을 잡고 들어가는구나.”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었다.
작은아버지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작은아버지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서도 나를 향한 하객들의 표정과 어딘가에 앉아 있을 나의 오빠와 사촌들과 친척들, 그리고 맨 앞좌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엄마의 모습이 모두 보이는 듯 했다. 노쇠와 지병으로 인해 가장 곧게 서 있을 때조차 선사시대 사람처럼 등이 굽은 작은아버지는 내 손을 힘주어 잡은 채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걸음씩 나아갔다.
한편 엄마와 내가 결혼식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고 생글거린 것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적어도 딸과 사위의 절을 받는 순간에는 울지 않을까 궁금해 했던 뒷자리에 앉은 엄마의 친구들은 앞좌석의 친구들로부터 이런 말을 전해 들었다.
“울긴, 모녀가 둘 다 동그란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네.”
또한 나는 2층의 예배당에서 1층 폐백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드레스자락을 잘못 밟아 크게 구를 뻔 하기도 했다. 계단 아래에 있던 고모와 고모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것이 먼저였고, 내 몸이 중심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다행히도 몇 계단 남지 않은 상태였고, 고모 내외가 재빠르게 달려와 나를 붙잡아 주어서 큰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양쪽에서 내 팔을 붙잡은 채 한동안 놓지 않았던 고모와 고모부는 나보다도 더 놀란 듯 했다.
1층에 있는 널찍한 온돌방에서 폐백식이 진행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피로연장으로 빠져나가고 양가의 가족들만 남게 되자 분위기가 한층 진지해졌다. 양가의 친척들은 우리 부부를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는 형식으로 자리 잡고 앉았다. 시댁 어른들의 소개와 인사가 끝나고 우리 가족의 차례가 되었을 때, 첫째 작은아버지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설 때 작은아버지의 몸이 휘청하고 흔들려서 주위를 약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곧 중심을 잡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러고는 “죄송합니다. 얼마 전까지 몸이 조금 불편했습니다.”라고 사과를 한 뒤, 우리 가문의 족보와 역사에 대해 짧고 간략하게, 그러나 책을 읽듯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나도, 엄마도, 다른 가족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작은아버지에게는 미리 준비되었던 일인 듯 했다. 시댁의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작은아버지의 등 뒤의 창밖으로 꽃망울이 핀 가지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 뿌리가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되지 않았다.
교회 맞은편에 마련된 피로연장에서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한쪽 구석에 앉아 뜨거운 곰탕을 먹은 후, 우리는 예식장을 떠나 김해 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는 밤하늘을 날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공항건물 밖으로 나오니 누군가 따듯한 외투로 어깨를 덮어주듯 포근하고 묵직한 공기가 어깨를 내리눌렀다. 이국의 뿌연 밤하늘에 키 큰 야자수들의 검은 실루엣이 선명하게 솟아 있었다.
후일에 나는 서울로 돌아가는 두 대의 관광버스 중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이 탄 버스에 동석했던 나의 친구로부터 그날의 귀성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 아줌마’들의 관광버스였다고 친구는 전했다.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귀청이 떨어져 나가도록 트로트를 불러대다가 나중에는 좁은 복도로 모두 몰려나와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고 했다. 나의 엄마는 운전석 근처의 복도에 선 채 술에 취해 발그레진 동그란 얼굴로 웃고 또 웃었다고 했다.
*
결혼하기 몇 해 전부터 아버지의 제사를 엄마와 나 단 둘이서 지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의 제사까지 합쳐 집안의 제사가 세 차례나 되자 친가의 친척들이 큰며느리인 엄마의 일손을 덜기 위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를 한 날로 모으고 아버지의 제사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제사는 장마를 전후로 한 습하고 무더운 여름이었다. 결혼을 한 그해 여름, 나는 남편과 함께 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했다. 우리 가족만의 행사로 축소된 이후로 제사음식을 마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산다거나 추리닝 차림으로 절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소홀해졌었던 아버지의 제사가 사위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전철역에서 나오니 어스름이 내려 있었다. 역 앞에서부터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동네를 걸어가며 나는 남편에게 어릴 적에는 이 동네에 집채 만 한 굴뚝에서 흰 연기가 하루 종일 뿜어져 나오던 커다란 조미료 공장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높은 둑방길을 걸으며 바라보았던 시커먼 공장폐수가 흐르던 개천은 아파트 입주자들을 위한 푹신한 인조 조깅길이 깔린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음식냄새가 진동했다. 엄마는 명절 못지않은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 한쪽에 제사상이 차려지고 난 후, 엄마가 장롱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꺼내왔다. 작은 흑백증명사진을 확대해서 만든 영정사진은 입자가 굵다 못해 물에 번진 것처럼 윤곽이 무너져 있었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듯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사진은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장롱 서랍 한쪽 구석에 수건들과 함께 포개어져 있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상 위에 놓이곤 했던 익숙하고도 오래된 사진이었다. 아마도 그 사진은 지금 집안에 남아 있는 물건들 중 가장 오래된 물건일 지도 몰랐다.
나는 남편과 함께 상 앞에 섰다. 남편이 나의 아버지와 대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남편은 술을 따라 아버지의 사진 앞에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절 대신 기독교식으로 고개를 숙여 묵상을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에는 친척들과 함께 절을 하는 엄마는 이번에는 우리를 따라 함께 묵상을 했다. 부엌에서 약재를 넣은 닭찜이 푹푹 거리며 익는 소리가 들려왔다.
묵상이 끝나자 엄마는 아버지의 사진 앞에 놓인 수저를 들어 밥그릇과 국그릇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우리 셋 모두 잠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아버지의 시간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아버지의 제사상에 평소 아버지가 좋아했다는 커피나 카스텔라, 바나나 등을 올려놓곤 했었던 것이 문득 기억났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까마득한 일이다.
저녁식사까지 모두 끝내고 나자 늦은 밤이 되었다. 아파트의 열어놓은 거실 창밖으로부터 역전 특유의 부산스런 소음이 흘러들었다. 제사상보다 더 신경 쓴 것이 역력해 보이는 저녁상으로 인해 배가 잔뜩 부른 우리는 엄마와 함께 천변으로 밤 산책을 나섰다. 천변의 어두운 강물에는 수천 개의 아파트 불빛이 무수하게 떠 있었다. 나는 또 남편에게 예전에는 이 개천이 온갖 쓰레기들이 둥둥 떠다니고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동네가 변해가는 모든 과정과 모습들을 무심하게 지켜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고 나자 어릴 적의 동네 모습이 새삼스럽게 자꾸만 떠올랐다.
천변의 공원에는 밤늦은 시각임에도 운동을 하거나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고 있는 긴 강변길을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
나의 최초의 기억은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으로 그 이전의 기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형태의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하루가 시작되듯 나에게는 그때의 기억에서부터 삶의 형태가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실제로도 그 기억은 잠에서 막 깨어난 직후에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오빠와 나는 할머니의 방으로 불려갔다. 할머니는 이불이 널브러진 몹시 어수선한 방에서 붉은색 이불을 깔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등 뒤의 텔레비전에서는 밝고 활기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시 붉은 색 이불에 그려져 있던 무늬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겁을 먹고 있었던 듯하다. 거대한 몸집과 황소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할머니를 나는 언제나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날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부드러웠다.
할머니가 말했다.
“아빠는 미국에 갔다.”
할머니는 우리 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가 너희들에게 아빠에 대해 묻거든 미국에 갔다고 대답해라. 알겠지?”
나는 할머니가 우리에게 뭔가 중요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감지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할머니의 말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할머니의 말대로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갔다고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버지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엄마에게 묻곤 했다.
한편 할머니의 방에 오빠와 함께 앉아서 아버지가 미국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내 인생의 최초의 기억이라는 것에는 다소 의아한 구석이 있다. 분명 그와 매우 가까운 시기에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고, 또한 아버지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집에서 맞이했기 때문인데, 그런 강렬한 장면들은 기억에 전혀 없으면서도 그 직후의 일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설명하기 어렵다. 언젠가 한번은 엄마에게 도마뱀 꼬리처럼 잘려나간 나의 기억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너희들에 대한 기억이 없구나. 가게에서 일하다가 아빠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달려갔을 땐 모두들 이미 병원으로 떠나고 집이 텅 비어 있었어. 그때 나는 막연하게 너희들도 병원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병원에 가서는 너희들에 관해선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너희들은 병원에도 없었던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장례를 치를 때에도, 화장터에서도 너희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같아. 그때 나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너희들을 생각조차 못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까 정말 이상하구나. 그때 너희들은 어디에 있었던 거니?”
라고 엄마는 나에게 되물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몇 년이 지난 후,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는 이사를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 오빠와 나, 이렇게 다섯 식구였다. 새로 이사 간 동네는 서울의 북쪽 변두리였는데,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기찻길이 있어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천장이 우르르 울렸다. 서향집이라 오후가 되면 해가 마루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이사를 가기 전에 살았던, 나의 첫 기억이 시작되었던 동네는 사대문 안의 높은 언덕 지대의 동네로 6.25전쟁이 터졌을 때 이북에 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당시에 아홉 살이었던 아버지를 데리고 피난 왔다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반평생 눌러앉게 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 아래의 두 명의 삼촌과 두 명의 고모가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출가를 했다. 그곳은 또한 아버지가 결혼과 함께 떠났다가 몇 년 후 엄마와 우리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온 곳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듬 해 여름 아버지는 학창시절에 삼촌들과 함께 쓰던 대문 옆의 문간방에서 알콜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삼촌, 고모들이 자랐으며 내 기억에도 조금 남아있는 그 집은 기왓장을 얹은 ‘ㄷ’자 형의 서울식 개량 한옥으로 마당 한가운데에는 수돗가가 있었으며, 대청마루와 툇마루,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비탈길에 지어진 집이어서 길의 위쪽에서 보면 1층, 아래쪽에서 보면 2층 높이였고, 놋쇠 고리가 달린 대문에 이르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돌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 동네와 집을 떠난 후 한동안 나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향수에 시달렸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한옥들과, 길마다 골목마다 나 있는 긴 계단들과,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동네 꼭대기의 옛 성곽 등이 떠오를 때면 나는 가슴 한켠이 이상하게 답답해지곤 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영영 그 동네에 돌아가지 못하는 건 줄 알았다.
새로 이사 간 동네는 이전의 동네와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논과 밭이 사방으로 황량하게 펼쳐져 있고 가옥들과 비닐하우스가 드문드문 보이는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길이 아직 닦여 있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은 비가 오면 진창이 되었다가 할머니의 주름살처럼 울퉁불퉁하게 굳었다. 장사를 하기 위해 서울의 동쪽 끝까지 갔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엄마는 집으로 오는 길에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서 무섭다고 했다.
마을 끝에는 대규모 화학조미료 공장이 천변을 따라 세워져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맞이하게 되는 것이 라면스프 냄새와 흡사한 조미료 냄새였다. 오빠와 나는 불량식품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냄새를 좋아했으나 저녁이 될 때쯤엔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우리 집은 기찻길 맞은편의 똑같은 외양과 구조로 신축된 열 채의 단독주택 중 다섯 번째 집이었다. 할머니는 평생을 모아왔던 돈으로 그 집을 사고 나서 마당에 감나무와 목련나무, 모란과 온갖 화초들을 심었다. 하지만 이듬해 봄이 되자 감나무와 목련나무가 말라 죽어버리고, 모란만 살아남아 해마다 커다랗고 강렬한 꽃을 피웠다.
나는 여름만 되면 마당 한쪽 구석의 나뭇가지에서 해마다 똑같은 위치에 나타나 집을 짓고 나를 내려다보는 노랗고 검은 줄무늬의 커다란 거미가 몇 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루는 엄마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 저편의 현관 계단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에 할머니는 배까지 늘어지는 커다란 가슴을 런닝셔츠 하나로 가린 채 처마 그늘 아래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마당 끝에서 걸어 들어오는 우리 모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에미랑 딸이랑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판박이로구나.”
할머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며 보기 드물게 온화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아닌 그 짧은 장면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다만, 마당에 쏟아지던 뜨거운 햇볕 속에서 엄마와 내가 손을 잡고 서 있던 순간에 나의 어깨와 머리 위로 굵은 모래알처럼 떨어지던 빛의 입자들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편, 할머니는 당시 나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식구들 중에서 유독 나에게 더 엄하고 무섭게 대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가족이 서울로 상경하여 할머니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현이 쟤 때문에 에미 네가 나중에 속 꽤나 썩겠구나.”
무엇을 보고 그랬는지 할머니는 처음부터 나를 영악하고 되바라진 아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순하기만 한 엄마 대신에 나의 성정을 꺾어놓으려고 작정했던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걸핏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 나를 혼냈다. 나는 수시로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허벅지 위로 떨어지는 눈물자국을 얼얼하게 바라보곤 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엄마 고생시킬 년’이라고 했다. 구멍가게에서 군것질 거리를 사 들고 오면 ‘살림 말아먹을 년’이라고 삿대질을 했고, 깔깔 소리 내어 웃으면 ‘발랑 까진 년’이라며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니 에비가 우리 정현이, 우리 정현이, 노래를 불렀는데 이렇게 쑥쑥 크는 걸 보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가족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의 관심사는 멋 내기와 산, 그 두 가지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목욕을 다녀와서는 양복을 차려입고 다방 같은 델 가거나, 등산장비를 챙겨서 산에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는 할아버지 또한 무서워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법이 거의 없었으며, 가끔 밥상에서 내가 물을 많이 먹는 것과 반찬을 뒤적거리는 것으로 혼냈다.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인 최소한의 관심은 가끔 외출에서 돌아오면서 계란빵이나 호떡이 든 종이봉투를 우리 앞에 툭 던져놓는 것이었다.
당시 할머니의 이유 없는 포화와 할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나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었던 것은 막내 작은아버지였다. 북쪽 변두리로 이사를 간 직후에 막내 작은아버지 내외가 잠시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당시 신혼이었던 작은아버지 내외는 한국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해 놓고 할머니가 내어준 방에 기거하면서 미국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이유 없이 나에게 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막내 작은아버지는 여러 명의 조카들 중에서 유난히 나를 예뻐해 주었다. 작은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1년 동안 나는 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귀여워해주는 남자어른의 존재로 인해 마음이 항상 붕 떠 있었다. 집에서도 늘 영화배우처럼 머릿기름을 바르고 있었던 작은아버지에게서는 언제나 굉장히 강한 향수냄새가 났다.
비자가 나오자 막내 작은아버지 내외는 곧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에 서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한국에 다시 들어왔다. 작은아버지가 들고 온 커다란 가죽가방 속에서는 온갖 종류의 미제물건이 쏟아졌다. 미국과자들은 하나같이 달고 느끼했다. 미국에 관한 온갖 환상적인 이야기를 해 주던 막내 작은아버지는 한 달 후 다시 미국으로 떠난 뒤에는 단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시골구석 같았던 동네는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가 바라고 예상했던 대로 점점 발전했다. 흙먼지 날리던 비포장 길과 논밭이 사라지고, 빌라와 주택들이 구획에 맞춰 들어섰다. 큰길가에는 소방서와 구립도서관이 세워지고 곳곳에 횡단보도가 생겼다. 우리가 이사 온 직후부터 적어도 4, 5년 동안은 동네 전체가 항상 공사 중이었는데, 어딜 가나 시멘트 더미와 모래더미, 무더기로 쌓여있는 회색 벽돌들과 속이 텅 빈 커다란 콘크리트 하수관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교외선만 간간히 지나다니던 집 앞의 기찻길에 소문만 무성하던 전철역이 마침내 생기게 되자 할머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동네에서 나는 시멘트가 아직 마르지 않은 길들을 피해가며 초등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는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조미료 공장과 마주보고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면 하루 중 가장 짙은 조미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친구들과 함께 개천을 따라 둑방 위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둑방을 따라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성냥갑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촌이 있었다. 반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그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나는 자주 친구들을 따라 그곳에 놀러가곤 했다. 온 식구가 함께 쓰는 단칸방의 귀퉁이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혼자가 되어 해가 거뭇거뭇 지고 있는 둑방길을 걸어 내려갔다. 나는 둑방길을 걸으며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어른들의 유행가를 불러보기도 하고, 학교 숙제나 할머니에게 혼날 일 등을 걱정하기도 하고, 가끔은 붉은 양탄자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미국으로 떠난 막내 작은아버지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었을 때, 엄마가 장사를 그만두었다.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시작했던 속옷가게를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혼자 힘으로 계속 꾸려나갔지만, 사정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해서 빛만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동안 나는 엄마와 할머니가 ‘또 일수를 썼다’라든가 ‘요즘 같은 불경기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속옷과 내의, 양말, 스타킹, 손수건 등을 잡다하게 팔던 가게는 서울의 남동쪽 끝에 위치한 오래된 아파트 단지 내의 상가 건물 안에 있었는데, 독립된 공간이 아닌 어깨 높이의 파티션으로 이웃가게들과 구분되어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우리 가게의 위치는 서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유리 출입문 바로 앞에 있어서 오후의 무르익은 빛을 차지할 수 있었다. 엄마는 가게에서 서쪽하늘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엄마는 가게 안의 작은 책상에 앉아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며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렸다. 가게를 그만두게 되자 엄마는 가게에서 읽던 책들과 라디오를 집으로 가져와 내 책들 옆에 나란히 꽃아 놓았다.
엄마는 곧 새 일자리를 구했다. 을지로에 있는 한 오래된 고급호텔에서 객실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집 앞의 전철을 타면 한 시간 이내에 회사 바로 앞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오는 전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나는 이불 속에 누워서 엄마가 집을 나선 지 몇 분 뒤에 어김없이 들려오는 인천행 전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한편 할머니는 날이 갈수록 무릎이 굽어졌다. 비만으로 인한 당뇨와 관절염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두툼한 무릎 위에 쑥뜸을 올려놓고 살을 태웠다. 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할머니의 무릎 위의 수십 개의 움푹 파인 뜸 자국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을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는 전혀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는 앉은 채로 커다란 엉덩이를 끌고 다니면서 밥을 하고 청소를 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사과상자만한 어항을 집안에 들여놓았다. 작은 물레방아 모형이 돌고 있는 물속에는 붉은 색의 작은 금붕어들이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헤엄을 치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해 외출이 불가능해진 할머니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금붕어들을 무료함을 달래주는 작은 위안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하지만 금붕어를 기르는 것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던 할머니는 수시로 어항 속에 먹이를 부어넣었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금붕어들이 터질 듯이 팽팽해진 배를 드러내며 뒤집힌 채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어항 속을 비우는 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 그 후에는 텅 빈 어항만이 녹색 이끼만 엷게 말라붙은 채로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
앉은뱅이가 되어 엉덩이를 무겁게 끌고 다니던 할머니의 모습은 나에게 할머니의 대표적인 인상이 되었다. 그 후로 중풍으로 쓰러져 머리를 삭발한 채 누워 있던 모습도 나에게 그리 커다란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나는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묵직한 쌀자루처럼 앉아서 집안을 돌아다니던 모습만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지 이 년 남짓이 지난 어느 날, 할아버지가 설악산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디를 가도 가족에게 허락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이상하게도 작은아버지와 고모들에게 산행을 보고하고도 며칠 동안 망설이다 집을 떠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 날 아침에 죽었다. 나는 마당에 앉아 있다가 할아버지가 집 앞에 도착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커다란 산악배낭을 등에 진 할아버지는 등불이 걸리고 양쪽으로 활짝 젖혀진 대문 앞에서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한동안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할머니가 죽은 지 일 년 만에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그 동네에서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했다.
마른 햇살이 내리쬐던 겨울, 나는 엄마와 함께 대입 미술실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높은 산턱에 위치한 대학의 긴 언덕길을 올랐다. 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하얀 석고상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엄마는 난방이 되지 않는 텅 빈 실내체육관의 빈 관람석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시험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엄마는 나에게 기다리는 동안 깜박 졸면서 짧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엄마는 “꿈에서 네 아빠를 보았어.”라고 말했다.
다음해 초, 나는 다시 한 번 긴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 게시판에 붙은 내 수험번호를 확인했다. 봄이 되자 교정의 뒷산이 벚꽃들로 부풀어 올랐다. 나는 새 친구들을 사귀고 학교생활에 적응하면서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했다. 그와 함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가족이라는 집단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 종일 강의실과 학교식당, 호프집과 노래방 등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밤늦게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집이 낯설게 느껴지고, 잠들어 있는 엄마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답답해 보였다. 또한 가족 친척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명절 연휴나 가족행사들이 지루하고 따분하다 못해 고역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족주의에서 비롯된 문화가 모두 쓸모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엄마와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식의 생각이 들곤 했다.
한편 동네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이끌리듯 다시 한 번 큰 변화의 물결을 겪었다. 동네의 상징적인 시설이었던 조미료 공장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대규모 아파트 부지가 들어섰다. 공사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북쪽의 판자촌이 무너졌다. 5년 넘게 진행되었던 공사에서 아파트의 외관이 꾸며지기 전까지는 헐벗은 콘크리트 구조물들과 위압스런 기중기들로 인해 천변의 풍경이 늘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동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큰 길 앞 사거리에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약국, 시계방 등이 사라지고,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대형마트는 생긴 순간부터 사람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여 동네의 중심을 넘어 아예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형마트 주변으로 패스트푸드점과 스낵, 도넛가게 등이 우후죽순 생겨나 오후가 되면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글거렸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거리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면 나는 대형마트의 눈부시게 환한 대형 전면창 너머로 카트를 앞세운 사람들이 비스듬한 경사의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천천히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기억의 파편으로만 남아있는 성곽이 있던 옛 동네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던 도중, 차창 밖으로 전구불이 환하게 밝혀진 시장골목을 바라보다가 어떤 향수 같은 것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린 것이었다. 옛 정취가 남아있는 듯한 재래시장 골목을 지나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시작되었던 사거리에 이르자, 나는 곧 그곳에서 내 기억과 일치하는 것이라곤 집으로 향하는 방향뿐임을 알았다. 낡은 유리문이 달린 문방구와 구멍가게 등이 있었다고 기억되는 모퉁이에는 가판대에 과일들을 진열해 놓은 큰 슈퍼마켓과 광고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통신사 대리점과 형광색의 긴 간판이 걸린 편의점이 늦봄의 어스름한 저녁 빛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언덕길을 올랐다. 나는 골목이며 집 등이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작고 협소하다는 것에 무척 놀랐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간판들로 인해 여타 다른 동네들과 판에 박은 듯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었다.
나는 예전의 우리 집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장소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두 갈래 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터에는 붉은 벽돌의 3층짜리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오래된 한옥 대신 들어서 있는 건물을 보자 기억의 일부가 철거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물 안에서 초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뛰어내려왔다. 아이는 건물 앞에 선 나를 지나쳐 골목을 뛰어 내려갔다. 골목 아래쪽에선 학원 차량으로 보이는 봉고 한대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이, 삼분 남짓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어스름이 내려앉은 내리막길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엄마에게 예전의 동네를 찾아가 보았다고 말했더니 엄마는 내게 “너도 참 별나구나.”라고 말했다.
*
우리는 결혼한 지 4년이 지나 제주도로 내려갔다. 남편에겐 서울생활의 고달픔이, 나에겐 새로운 생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낯모르는 곳에서 적응을 해야 하는 두려움보다 더 큰 작용을 했다.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서북쪽의 한 해안가 마을에서 시골집을 임대해 살면서 화창한 날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제주에서는 어느 곳에 있던지 바다가 보였다. 나는 푸른 바다와 검은 돌담과 선명한 페인트색의 낮은 지붕들이 어우러져 있는 제주의 풍경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늘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여행객이 아닌 정착민이 되기 위해 서울에서와는 다른 종류의 노력들을 했다.
우리가 제주도라는 섬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뭔가 특별한 일이 되었다. 우리가 제주도에 내려온 해부터 시작해서 해가 세 번 바뀌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시댁 식구들과 친정 식구들, 친척들, 남편과 나의 친구들이 계절마다 우리를 찾아왔다. 심지어는 평소에 연락이 거의 없었던 이들까지도 제주공항에 도착해서는 우리에게 연락을 해 왔다. 남편과 나는 공항에서 사람들을 떠나보낸 후에는 항상 공항 내의 스타벅스에 들러 큰 사이즈의 진한 커피를 마시며 피곤함을 풀었다. 사람들이 두고 간 서울의 이런 저런 소식들은 욕실에 두고 간 칫솔을 치우듯 쉽게 잊혀졌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막내 작은아버지가 3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나를 만나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 제주를 방문하기 며칠 전 전화연결이 되었을 때 작은아버지는 지하철을 타고 큰고모네 집으로 이동 중이었다. 작은아버지는 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지 커다란 목소리로 “지하철이 너무 복잡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서울이 너무 많이 변했구나.”라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지하철의 소음 때문에 나 역시 작은아버지의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비록 단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막내 작은아버지와 나는 간간히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막내 작은아버지와 다시 연락이 닿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 어렵고 힘들기만 했던 직장생활에 점점 적응을 해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두툼한 국제우편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뉴욕 맨해튼의 주소가 찍힌 작은아버지의 편지의 첫마디는 ‘그리운 정현이에게’였다. 여덟 장에 걸친 긴 장문의 편지에는 힘들었던 지난 미국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편지의 말미에는 ‘하루하루가 너무도 고된 나머지 한국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세월이 흘러버렸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이후로 막내 작은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수십 년의 고생 끝에 이제는 맨해튼 중심가에 제법 큰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작은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Daniel. NY.Co.라는 가게이름이 인쇄된 종이에 항상 편지를 적어 보냈다. 한번은 편지에 맨해튼 거리에서 바라본 슈퍼마켓의 전경이 찍힌 사진이 함께 동봉된 적이 있었는데, 프린트 용지에 저화질로 출력된 거친 입자의 사진은 ‘파리, 텍사스’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작은아버지는 편지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면 때때로 옛날 일들이 생각나곤 한단다. 큰 형, 작은 형과 한 방을 쓰면서 함께 공부도 하고, 만화책도 보고, 싸우기도 했던 일들이 아련하게 떠오르는구나’라고 썼다. 또 이렇게도 썼다. ‘정현이 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겠지만 나는 세상에서 큰 형을 제일 좋아했단다’.
30여년 만에 고국을 찾은 막내 작은아버지 내외는 큰고모 내외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서해안의 유명관광지들을 경유하며 장흥까지 내려온 후 배에 차를 싣고 제주항에 도착했다. 퇴근을 한 후 나는 남편과 함께 막내 작은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제주시내로 향했다. 비 온 뒤의 깨끗해진 도로와 맑게 갠 저녁 하늘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작은아버지 일행은 제주시내의 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작은아버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신기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는 현재의 내 모습과 조우한 것 같았다. 나는 기억 속의 작은아버지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작은아버지 중 누구와 조우한 건지 몰라 어정쩡한 기분이 되었다. 작은아버지는 많이 변해 있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던 장신의 젊은 남자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몸집이 많이 불어 있었고,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 못지않게 주름살 또한 크고 두드러지게 잡혀 있었다.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작은아버지 역시 나에게 어릴 적 모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작은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어릴 적에는 몰랐는데 지금 정현이 네 얼굴에서 큰 형의 모습이 아주 또렷하게 보이는구나.”
막내 작은아버지 내외와 큰고모 내외는 2박3일 동안 제주도에 머물렀다. 우리 부부는 늘 하던 것처럼 관광지도와 여러 가지 팸플릿 등을 펼쳐놓고 갈 만한 관광지를 이곳저곳 추천했지만 다들 관광에는 그다지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내가 도서관에 출근해 있는 동안 미리 예약해 두었던 감귤체험이나 목장체험 등을 하러 갔다가 내가 퇴근하기 전에 집에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나에게 “이곳 제주도에서도 항상 주위를 눈여겨보면서 기회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꼭 잡아라”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작은아버지는 또 “한국이 너무 많이 발전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했다”라는 말을 자꾸만 반복했는데, 그때마다 작은아버지의 얼굴에는 무언가 기회를 놓친 듯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늙어버린 막내 작은아버지의 얼굴이 할머니의 얼굴과 너무도 닮은 것에 내심 무척 놀랐다. 나는 작은아버지가 오랜 장사 생활로 무릎이 망가져 오래 걷지 못한다는 사실과 최근에 잘못한 임플란트로 인해 음식을 잘 씹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얼마 전 작은아버지는 목숨처럼 아끼던 맨해튼의 슈퍼마켓을 한 인도인 형제에게 팔았으며, 그 자금을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알래스카로 이주하려 하고 있었다. 최근 알래스카 주는 인구를 늘이기 위해 이주민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말했다.
“지금 알래스카는 기회의 땅이란다.”
그러면서 작은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나는 젊은 시절에 마이애미에 맨손으로 떨어졌을 때처럼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단다.”
식사를 마치고 좌탁에 모여 차를 마실 때면 막내 작은아버지의 미국생활로 시작했던 대화의 방향이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나의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바뀌곤 했다. 매번 아버지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막내 작은아버지였지만 큰고모로부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제사를 지낼 때조차 서럽게 울던 할머니를 제외하곤 아무도 아버지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었다.
큰고모가 말했다.
“우리 형제들에겐 큰오빠가 부모님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어.”
큰고모가 어릴 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에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엄마가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는데, 나는 모양도 크기도 엉성한 그 옷을 입는 게 정말 싫었단다. 하루는 엄마가 만든 옷을 절대 안 입겠다며 울며불며 떼를 쓰고 있는데, 큰오빠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나를 마당으로 끌어내서는 빗자루로 마구 때리지 뭐겠니. 나는 큰오빠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 군말 없이 엄마 옷을 입고 다녔지.”
작은아버지가 말했다.
“맞아. 나도 걸핏하면 작은형과 함께 마당으로 불려나가서 기합을 받곤 했어.”
큰고모가 말했다.
“그리고 큰오빠는 아버지보다도 더 가장 같았어. 엄마가 쌀이 떨어져서 걱정하고 있으면 큰오빠가 책상에 앉아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잠시 후에 어깨에 쌀가마니를 지고 들어왔어. 주로 과외비를 선불로 받거나 과외를 해 주는 집에서 변통해 왔지.”
결혼 전부터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던 작은어머니에게도 나의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작은어머니는 청년의 아버지가 아닌 장년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은어머니는 나의 아버지가 구멍가게에서 술을 사고 있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고 했다.
“하루는 가게에 갔는데 아주버니가 이미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술을 사고 있었어. 그때 아주버니는 쬐그만 여자애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여자애에게 ‘들키면 너네 할머니에게 또 혼나겠구나’라고 말하더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 콧물이 찔찔 흐르던 쬐그만 여자애가 정현이 너였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작은아버지와 큰고모의 이야기보다 작은어머니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끌렸다. 바람에 나뭇잎이 쓸리듯 마음 한 구석이 쓸려갔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내가 있었다.
둘째 작은아버지 내외와 큰고모 내외가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제주도의 가을하늘은 내내 맑고 투명했다.
둘째 날 아침에 작은아버지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안방 조명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가 형광등의 수명이 다한 것으로 짐작하고 등을 갈아 끼우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것이었다. 작은아버지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놓고 올라가 등을 살폈다. 남편은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작은아버지가 의자에서 중심을 잃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작은아버지는 다른 방의 형광등을 빼오게 해서 교체해 보고는 그래도 불이 들어오지 않자 내게 두꺼비집의 위치를 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의자를 딛고 올라가 두꺼비집의 스위치를 하나하나 살폈다. 하지만 두꺼비집의 문제도 아니었다. 작은아버지는 나에게 네임펜을 가져오게 하더니 각각의 스위치 옆에 그것에 해당하는 장소를 일일이 적어 넣은 후에야 의자에서 내려왔다.
“배선에 문제가 생긴 것 같구나.”
작은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전기며, 하수도며 집안의 온갖 수리를 모두 직접 한단다.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으면 수리공에게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되더구나.”
그날 저녁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안방 천장 구석에 끈으로 매달아 고정해 놓은 조명램프를 발견했다. 야외용으로 보이는 양철 갓이 씌워진 조명램프 끝에서 주황색의 긴 전선줄이 벽을 따라 길게 내려와 있었다.
큰고모가 내게 말했다.
“오늘 네 작은아버지의 머릿속엔 온통 이것 밖에 없었단다. 우린 오늘 읍내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 철물점에만 들리고는 오후 세시도 안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단다.”
막내 작은아버지 일행이 제주도를 떠나는 날, 정오 무렵에 출발하여 성산 항을 향해 가는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주의 비구름은 언제나 그렇듯 내려앉을 듯 무거우면서도 끊임없이 사방으로 이동했다. 큰고모 내외와 작은어머니가 탄 차가 우리 뒤를 따라왔고, 막내 작은아버지는 우리 부부의 차에 동승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내가 되어 앞좌석에 앉은 작은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주도로에서 벗어나 1차선 도로로 접어들자 양옆으로 금빛의 억새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비는 그칠 듯 말 듯 하면서도 작고 투명한 물방울들이 유리창 위를 계속 굴러다녔다.
*
막내 작은아버지가 다녀간 후, 나에겐 어떤 마음의 후유증 같은 것이 남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슬픔과 결핍감을 느낄 때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막내 작은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죽어서 내 곁을 떠난 아버지처럼 작은아버지 역시 몇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두 사람 모두를 일말의 기대 없이 기다렸다. 나는 두 장의 셀로판 종이를 겹치듯 아버지라는 무형의 형상 위에 막내 작은아버지의 유형의 형상을 겹치고는 한 가지 색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막내 작은아버지와 다시 재회하게 된 것은 나에게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작은아버지는 나에게 아버지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다가왔다가 그림자를 남겨둔 채 떠났다. 나는 솟구치듯 깊어가는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종류의 쓸쓸함에 사로잡혔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나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어요.”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엄마가 말했다.
“내가 네 아빠 때문에 고생했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해줬는데 그러니? 네가 기억을 못 하고선.”
엄마의 목소리에는 아버지의 어두운 무게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지금과 같은 어투로 다른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듯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과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은 태도로 들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런가요.”라고 애매하게 말하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아버지가 39세의 나이에 알콜 중독으로 죽었다는 것과 무더운 여름에 있는 아버지의 제사 날짜뿐이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몇 장의 사진들. 회색 목 티에 곤색 야구 모자를 쓰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피부가 검고 각 진 턱을 가진 강하고 무뚝뚝한 인상의 사진 속의 아버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죽음에만 익숙해 있을 뿐 아버지의 삶에 대해선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생일조차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여름방학 때, 엄마와 오빠와 나 셋이서 야외수영장에 간 적이 있었다. 장사 때문에 엄마와의 바캉스는 거의 전무한 일이었기에 오빠와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 새벽부터 일어난 우리 남매는 엄마의 손에 의해 돌돌돌 말리는 검은 윤기가 흐르는 김밥을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텅 빈 수영장의 첫 입장객이 되었다가 마지막 퇴장객이 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풀장에서 오빠와 함께 물놀이를 하면서 시시때때로 멀리 차양막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하얀 리본이 달린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쓴 엄마는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튜브 위에 누워 둥둥 떠다니며 엄마를 바라보기도 하고, 물을 먹고 캑캑거리며 엄마를 바라보기도 하고, 오빠와 물싸움을 하면서 튀어 오르는 물보라 사이로 엄마를 바라보기도 했다. 엄마는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이 어쩐지 멀고 아득하게, 또 조금은 슬프게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란 엄마 주위의 텅 빈 공간이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서울에서는 몇 십 년 만의 폭설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주도에는 차가운 비가 내렸다. 며칠 동안 몸과 마음을 모두 얼어붙게 만들었던 추위가 한 풀 꺾인 어느 날, 나는 도서관 휴관일을 포함한 2박 3일의 여정으로 서울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도서관 휴일 전날 근무를 마친 후 밤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하루를 보낸 뒤 그 다음날 새벽 일찍 제주도로 다시 내려가는, 주말에 유난히 비싼 비행기 값을 생각하면 다소 무리가 있는 계획이었다. 엄마는 남편과의 동행도 아닌 나 혼자만의 짧은 방문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엄마는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밤 비행기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둡고 깊은 바다 위를 날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짐 하나 없는 가벼운 몸으로 공항에서 연결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서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서울의 땅 밑을 관통하는 것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나는 눈이 부시면서도 어두침침한 지하철의 불빛 아래 앉아 피곤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북쪽을 향해 갈수록 사람들의 표정과 행색이 조금씩 더 어둡고 초라해졌다. 나는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엄마는 졸음에 겨운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엄마는 늦은 밥상을 차리면서 내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엄마의 걱정처럼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다고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엄마를 찾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나는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엄마를 안심시킨 후에 뜨거운 국에 밥을 말아먹고는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둑어둑한 거실에 앉아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도시의 빗소리가 무척 복잡한 음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나는 흙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드는 제주도의 빗소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엄마가 늦은 아침잠을 자는 동안 나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 동네를 걸었다. 길가에 쌓여있는 지저분한 눈 무더기가 빗줄기에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는 엉망이 된 진창을 피해가며 골목을 거닐다가 노란 불빛이 따듯하게 켜져 있는 작은 커피 집을 발견했다. 유리문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속의 영상처럼 아득하면서도 평안해 보였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엄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내가 올라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엄마는 말을 먼저 꺼내놓고도 무언가를 회피하듯 어색해하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너도 참 새삼스럽구나. 그리고 다 네가 알고 있는 얘기일걸?”
나는 여기저기서 훔쳐들은 퍼즐조각 같은 이야기 말고 나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나는 엄마와 함께 오전 산책 때 발견했었던 커피 집을 찾아갔다. 외출준비를 하면서도 엄마의 얼굴에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창가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낮인데도 어둑어둑한 거리에는 저녁처럼 간판조명들이 밝혀져 있었다. 거리의 불빛 사이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카페에 앉아서도 어색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머그컵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엄마의 회사일과 친척들의 근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계속 딴청을 부리고 있자 엄마가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엄마의 표정에는 약간의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래, 아빠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뭐니? 무슨 이야기부터 해줄까?”
그리고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 아빠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이상한 술버릇이 있었어.”
엄마가 말했다.
거리에 우산을 든 사람들이 카페 앞을 종종걸음으로 지나쳐갔다.
“네 아빠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한 대접씩 술을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었어. 불면증이 심했거든. 술뿐만이 아니라 두 알의 수면제도 꼭 필요했어. 네 아빠는 술과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는 게 불가능했단다. 네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로는 네 아빠가 고등학생 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대. 우등생이었던 아빠는 늘 밤을 새우며 공부를 하곤 했는데, 새벽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쯤엔 이미 머리가 각성이 된 상태라 잠을 자는 게 쉽지 않았대. 그래서 항상 자기 직전에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곤 했는데 그게 고칠 수 없는 불치병 같은 습관이 된 거지.”
하지만 엄마가 말하는 이상한 술버릇이란 그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말했다.
“사실 자기 전에 술 한 병씩 마신다는 것은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하루에 술 한 두병씩 마시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니? 하지만 아빠의 술버릇은 이상했어. 그 버릇은 두세 달 마다 한 번씩 나타나곤 했는데,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회사까지 결근하면서 며칠 동안 내리 술만 마시는 거야. 그때는 누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어. 술에 취해 기절하듯 쓰러져도 다시 눈을 뜨면 술부터 찾았어. 내가 화내고, 소리치고, 매달려서 빌고 애원해도 아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했어. 아빠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끊임없이 술만 마셨어.”
며칠 동안 계속되던 기이한 음주가 끝나면 술에서 깨어나면서 아버지는 무척 괴로워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마당 한 구석에 주저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렇게 차마 옆에서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의 고통이 끝나면 아버지는 더없이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마침 뱀이 허물을 벗듯 멀쩡하게 일어나 다시 회사에 출근을 하고, 퇴근길에 우리에게 줄 과자를 사오기도 하면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나의 아버지는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술 말고도 의존하는 것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약이었다. 아버지는 약 없이는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잠에서 깨기 위해 각성제를 먹었고, 식사 후에는 반드시 소화제를 복용해야 했으며, 습관처럼 종합영양제를 찾았다. 그리고 술과 함께 두 알의 수면제를 먹고 난 후에야 자신의 신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는 한 번 몸에 밴 습관을 떨쳐내지 못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한 번 모자를 쓰기 시작하면 그것을 벗지 못해서 일 년 내내 같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 내가 보았던 몇 장의 사진에서 아버지는 항상 곤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한 두꺼운 양말을 두 개씩 겹쳐 신던 겨울의 습관이 여름이 될 때까지 이어져서 엄마를 경악케 했다. 무더운 한여름에 나의 아버지는 한 켤레의 양말을 신은 후, 괴로운 표정으로 또 한 켤레의 양말을 신었다.
“그리고 네 아빠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어. 가족동반으로 회사 야유회에 가면 네 아빠는 항상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곤 했어. 네 아빠는 우리 네 식구만 오붓이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는 저 멀리서 회사 가족들이 서로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보면 참 부러웠어. 네 아빠가 돗자리에 누워 잠들고 나면 우리 셋만 나무그늘 아래 남았는데 나는 조금 허전하고 쓸쓸하고 그랬단다.”
엄마의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기억 속의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돗자리에 홀로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쓸쓸한 풍경이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로 넘어가면서 거리에 행인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엄마가 창밖을 바라보더니 맞은편의 과일가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과일가게 주인 할아버지 말이야. 돌아가신 것 같아. 얼마 전부터 딸인지 며느리인지 젊은 여자가 가게를 보더라구. 그런데 과일 맛이 영 달라졌지 뭐니. 양도 전보다 적게 주고 시들시들해. 할아버지가 팔던 과일이 참 맛있었는데.”
맞은편의 과일가게는 우리 집의 단골 가게였다. 나는 겨를 깐 커다란 양은 대야에서 사과를 골라 담아주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의 말대로 할아버지가 담아주던 사과는 유난히 크고 아삭아삭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과일 맛이 변했다고 해도 나는 신물 날 정도로 많은 프랜차이즈 상점들 틈에서 옛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게 여겨졌다.
엄마의 이야기는 우리 가족이 서울로 상경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삼척의 한 개발회사에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추진했던 몇 년 간의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고속터미널의 지하상가에 가게를 하나 임대해놓고 우리 가족을 기다렸다. 우리 가족이 상경하던 날 서울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해 봄, 아버지와 엄마는 할머니가 마련해 준 지하상가의 가게에서 속옷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들을 상대하며 내의, 속옷 등을 파는 일에 아버지의 손이 필요한 일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새벽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어오는 일 말고는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가게 앞의 공터에서 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이듬해 여름 죽기 전까지 1년 동안 네 아빠는 걷잡을 수 없이 망가졌어.”
아버지의 모든 안 좋은 기질과 습관들이 술과 합쳐지자 그것은 빠져나올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이 되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오후쯤에 곯아떨어지잖니? 그러면 꼭 밤에 깨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새벽 한 두 시부터 도매시장에 가자고 나를 깨우기 시작해. 심야버스를 타고 동대문 도매시장에 도착하면 두세 시, 그러면 시장 문이 열리는 다섯 시까지 길바닥에 마냥 쭈그리고 앉아있는 거야. 나는 잠이 모자라서 괴로워 죽을 것 같은데 네 아빠는 술에서 깨어나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새벽이 되기만을 기다렸어. 당시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해골처럼 바싹 말라서 몸무게가 37kg까지 내려갔었어.”
엄마는 여자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힘든 하루하루에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후줄근한 엄마의 행색을 오히려 반겼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게 구석에 앉아 술에 취한 눈으로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꾸밀 줄 모르는 여자라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야. 네가 다른 여자들처럼 화장이나 덕지덕지 바르고 다니는 여자였으면 난 너랑 살지도 않았어.”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엄마와 살면서 엄마에게 예쁘고 화려한 옷을 사주고 입혀보는 것을 월급쟁이 생활의 낙으로 삼았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것에 가족들 모두 속수무책이었다고 했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의 속도를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엑셀을 힘껏 밟은 것뿐이었다.
이듬해 봄부터 아버지는 걷지 못하게 되었다. 무릎과 다리 근육에 전혀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서 있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해졌다. 하루 종일 지하에서 생활한 탓에 생긴 각기병인지, 끼니를 거르며 술만 마셔서 영양실조에 걸린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자리를 보존하고 누운 아버지를 위해 하루 종일 한약을 달였다. 계절이 점점 더 화려해지는 동안 엄마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몸과 그보다 더한 무너지는 마음으로 혼자서 집과 가게를 오갔다.
아버지는 작은 문간방에 누워서도 술을 찾았다. 할머니가 술병을 감추고 방문을 걸어 잠가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감시가 잠시 소홀해진 사이에 꺾어지는 무릎으로 벽을 짚으며 거의 기듯이 집을 빠져나와서 술을 구해왔다. 어느 날 엄마는 아버지가 누워있는 방의 창문을 열었다가 창밖의 벽과 담의 좁은 틈 사이에 수없이 쌓여 창문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있는 빈 술병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엄마가 문득 재미있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정현이 네가 아빠 술심부름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 줄 아니?”
“제가 정말 그랬어요?”
나는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아빠가 동전 하나 쥐어주면 너는 좋다고 팔랑팔랑 뛰어나갔어. 아빠 방으로 들어가는 너를 붙들어 세우면 너는 조막만한 손으로 커다란 술병을 꼭 쥐고 있었어.”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동조자인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죄책감 같은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들 중에서 그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가장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자, 아버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병석에 누워서도 아버지는 어떻게든 술을 구해왔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아버지가 덜덜 떨리는 다리로 벽에 기대어 선 채 구멍가게 쪽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술은 아버지의 정신을 파먹기 시작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도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내 가게는 내가 지킨다’ 라고 소리치곤 했어. 그리고 네 오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받아온 상장을 오빠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도 했어. 나중에는 너와 네 오빠를 알아보지도 못했단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아버지의 몸이 점점 붓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검은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하며 터질 듯이 팽팽해졌다.
엄마가 말했다.
“그해에는 날씨가 또 어찌나 무덥던지, 한 걸음 뗄 때마다 눈앞이 일렁이고 하늘이 노래졌어. 할머니는 갈빗대처럼 마른 나를 보곤 ‘이러다 에미 네가 먼저 죽겠다’라고 말하기도 했어.”
할머니는 찜통 같은 부엌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아버지의 한약을 달이면서 엄마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기왕 갈 거면 차라리 얼른 갔으면 좋겠다. 에미 너라도 살게.”
엄마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있잖니, 아빠가 죽고 나서는 한 달에 꼬박꼬박 1kg씩 살이 찌지 뭐겠니? 나중에는 네 할머니에게 눈치가 보여서 몰래 밥을 굶기도 했다니까.”
그 무렵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소문을 들은 동네 할머니들이 틈만 나면 찾아와서 무언가를 기다리듯 숨을 죽이며 마당 안을 어정거리다 가곤 했다. 가족들은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숨 막힐 듯한 무더위 속에서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으로 가게와 집을 오갔다.
엄마가 말했다.
“가게에서 하루는 오후 즈음에 더위에 지쳐 책상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에 아빠가 나왔어. 그런데 아빠가 방문을 연 채로 앉아서 방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처럼 두 손을 뻗으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거야. 굉장히 괴롭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살려달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어. 그러다가 잠에서 깼는데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더라. 가슴이 마구 뛰어서 진정이 되질 않는 거야.”
그리고 엄마는 잠에서 깬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할머니로부터 가게 문을 닫고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택시를 타고 최대한 서둘러 들어오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 역시 집에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을 차마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니까 아무도 없고, 집안이 텅 비어 있었어. 마당에 동네 할머니들만 몇 분 계셨는데 할머니들 역시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병원으로 빨리 가라고만 재촉했어. 나는 택시를 또 잡아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빠는 이미 죽어 있었어.”
아버지의 사인은 혈관파열이었다. 죽음에 이른 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한약을 갖다 주러 아버지의 방문을 열었다가 관자놀이 근처에서 터진 혈관에서 새어나온 피로 인해 한쪽 얼굴의 피부 안쪽이 붉게 물든 채 의식을 잃은 아버지를 발견했다. 나의 아버지는 물도 제대로 넘기기 힘든 몸으로 술을 마신 뒤에 잠이 들었다가 자신의 몸이 자신을 배신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죽었다.
엄마는 병원에 도착한 이후부터 장례식까지의 일들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이 화장되는 동안 화장터의 뒷산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만이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아버지는 재가 되어 산에 뿌려졌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죽은 사람 챙길 필요 없다’며 엄마를 산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아버지가 있는 산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뿌려진 곳에 나중에 할머니가 뿌려졌고, 할아버지가 뿌려졌으며 마지막으로 결혼식장에서 나의 손을 잡아주었던 첫째 작은아버지가 뿌려졌다. 고모 역시 그때마다 엄마를 데려가지 않았다.
엄마가 말했다.
“네 아빠와 연애할 때 말이야. 네 아빠는 사차원이니 초능력이니 상대성이론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무척 많았는데, 한번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어. 종이를 삼각뿔 모양으로 접어서 세어놓고 정신을 집중해서 그 삼각뿔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가라’하고 외치면 삼각뿔이 뱅글뱅글 돌아간다는 거야. 인간에게는 초능력이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나는 네 아빠의 이야기라면 무조건 철석같이 믿었어. 그래서 한동안 저녁마다 아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혼자 방에서 그걸 그대로 했었겠지 뭐겠니? 꼭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이야. ‘돌아가라!’하고.”
나의 아버지는 1942년 음력 5월 5일 단오 날에 태어나서 1981년 7월 21일에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74년 8월에 나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그해 12월에 오빠가 태어났고, 이년 뒤에 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7년의 결혼 생활 만에 우리와 이별했다.
나의 아버지는 엄마에게 삼각뿔의 종이를 집중해서 바라보다가 ‘돌아가라’라고 간절하게 외치면 종이가 뱅글뱅글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대로 삼각뿔의 종이를 바라보며 ‘돌아가라’라고 매일매일 외쳤다.
나의 아버지가 간절하게 외쳤다.
돌아가라.
*
이듬해 가을 나는 추석연휴를 이용해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시댁의 할아버님 제사가 서울로 옮겨진 까닭에 시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시누 집과 큰아버님 댁을 오가며 명절을 보낸 뒤 연휴의 마지막 날 우리 부부는 나의 친정으로 갔다. 나는 지난여름에 업무가 많아 챙기지 못했던 여름휴가를 추석연휴와 연이어 신청해 일주일간 친정에 머물 수 있었다.
아침에 엄마가 출근하고 나면 나와 남편은 오전 내내 빈둥거리다가 오후에는 시내를 돌아다녔다. 거리에서 쉴 데라곤 카페 밖에 없었던 까닭에 우리는 카페를 전전하며 서너 잔의 커피를 마신 후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에는 크고 작은 카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엄마가 회사를 쉬는 날, 우리 세 사람은 삼청동의 한 미술관을 찾았다. 어느 대기업의 자제가 운영하는 제법 큰 규모의 미술관으로 수준 높은 전시를 자주 열어 평판이 좋은 곳이었다. 그곳 지하에는 다큐멘터리나 예술 영화를 상영해주는 예술전용극장이 함께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기로 되어 있었다. 추석 개봉 영화들이 하나같이 탐탁지 않아 인터넷을 뒤지던 중 우연히 발견한 영화로 ‘다니엘 바렌보임과 괴테의 서동시집’이라는 다소 긴 이름의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영화제목을 말해주자 엄마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곧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따라나섰다.
우리 세 사람은 관광객이 붐비는 삼청동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 미술관에 도착했다. 미술관에서는 재미작가 이불의 최근작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작가였다.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서 우리는 미술관 입장권을 끊었다. 작은 거울조각들로 뒤덮인 동굴 형상의 거대한 설치물 앞에서 남편은 엄마에게 작가와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엄마는 남편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2층까지 이어진 미술작품의 감상이 끝난 후 우리는 지하로 내려갔다. 이인용 탁자세트가 몇 개 놓여있는 대기실에는 홀로 영화를 보러 온 몇몇의 젊은 관객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엄마는 어색한 몸짓으로 한쪽 구석에 비치되어 있는 영화 팸플릿들을 뒤적거렸다.
영화는 내내 지루했다. 그러나 조용한 클래식과 단조로운 내레이션이 계속 이어지는 지루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영화 속에서 노년의 다니엘 바렌보임은 끊임없이 땀을 흘리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중동의 평화를 위해 삶의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다니엘 바렌보임의 얼굴의 검버섯 위로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좋았다. 그가 관객들 앞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있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늙고 두툼한 손을 건반 위에 얹은 지 몇 소절이 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런 식의 크고 넓고 따듯한 위로를 원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에서 나오자 거리에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하늘은 아직 밝았지만 빛이 사그러지고 있는 하늘 끝에는 노을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하나 둘씩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는 좁은 삼청동 길을 걸어 내려갔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인사동 사거리는 정체된 차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거리는 어디선가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시장 통처럼 북적거렸다. 얇은 여름옷 위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지나갔다. 길모퉁이에 서서 엄마가 내게 이제 어디로 갈 건지 물었다.
- 계간 『제주작가』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