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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문
전기도 수도도 없는 외딴집이었지
상방도 큰방도 조용한 봄날 저녁
연년생 동생은 상방 할매 곁에 자고
젖먹이 막내는 친정 온 큰고모 등에
맏이인 나는 엄마 등에 업혀
물문 아지매네 연속극 보러 갔지
다 큰 게 업혀간다고 삼촌들 놀려대도
그 밤 엄마는 오롯이 내 것
못 들은 척 잠든 척
엄마 등에 꼭 붙어 물문 갔지
낮에 운택이 삼촌이 데려 간 물문
삼촌은 나를 거꾸로 들어 올려 발목을 잡고
물의 문 앞에 내 여린 머리를 가져다 놓았지
세상이 별안간 뒤집힐 때
열린 물의 문 경계에서
숨을 참고 보았지
찬란한 공포
산란하는 슬픔
천둥의 포말 속
깨지며 깨어나는
빛의 신음
삼촌은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잔히 흘러갔지
그런 운택이 삼촌이 밉고도 좋았지
우리는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나눠 가진 사이
삶과 죽음을 몰랐으나
어떤 문을 통과하면
돌아 나올 수 없는 한 세계가 있다는 걸
알 것도 같았지
그 저녁엔 오롯이 내 것인 엄마에게도
낮에 본 물문 이야기만은 비밀이어서
눈도 입도 꼭 닫고
물문 갔지
한 때 살인자가 숨어 지냈다는 빈 점방 지나
목맨 귀신이 붙어산다는 느티나무 지나
연속극 보러
물문 갔지
신준영 5longgole@hanmail.net
이호석 ㅣ 공중 필사
2025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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