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목포 시화마을
다섯 살 아이를 위탁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 시절은 나에게 저녁 8시라는 수평선을 남겼다. 세월이 흘러 나 혼자 다음 세계로 건너갈 때, 스르르 스스로 눈감을 수 있다면 혼자 읊조리고 싶은 문장이 있다.
“저녁 8시야, 이제 자는 시간이야.”
나는 자는 척할 것이다. 잠을 자는 척 눈을 감았을 뿐인데, 어느새 아침이 되었을 것이다. 난 죽어서 아침이 될 것이다. 아침이 되어서, 그냥 아침이 될 것이다.
나는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오랑은 목포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줄곧 다른 반이었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서른다섯 살 오랑이가 목숨을 끊을 때까지 우리는 자주 친했다. 6학년 첫날 반장이 되었다. 오락부장이나 응원단장을 맡을 때와는 달리 조금 설레었다. 처음 맡은 임무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봄 소풍에 선보일 장기자랑 연습이었다. 오락부장에서 반장으로 신분상승을 한 나는 봄소풍 일정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하교 후 장기자랑에 참여하고 싶은 학생들은 교문 앞으로 모이라 전했다. 당시만 해도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많이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그중에 오랑이도 있었다. 춤을 출까 패션쇼를 할까 고민을 하다 춤으로 정한 우리는 이제 연습할 장소에 대해 의논을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집에 가서 연습하기로 하자. 너희 집은 어디야? 그럼 너는? 그럼 넌?” 아이들은 하나둘 자신의 집이 어딘지 이야기를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오랑이가 보육원 아이였는지 몰랐다.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티가 났다. 수업이 끝나면 그 아이들은 서둘러 집으로 갔으니까 하지만 6학년이 되어 만난 오랑이는 수업이 끝나도 나랑 많이 놀았다. 아이들이랑 달리기 시합도 하고 자전거도 빌려 타며 저물 때까지 놀았다. 우리는 손발이 흙빛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바닷일 나간 엄마가 돌아오는, 엄마 손등처럼 하늘이 거칠게 저물어서야 집으로 갔다. 오랑이도 비슷했다. 오랑이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유희의 시간만큼 더 많은 곳을 청소하는 등 더 많은 임무와 벌칙을 받았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오랑이네 집이 가장 가깝네, 가자! 오랑이네 집으로!” 거리로 따지면 정말로 오랑이가 사는 보육원이 가장 가까웠다. 보육원은 넓었다. 시멘트가 발라진 오솔길을 따라 정원도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우리는 준비한 카세트가 없어서 노래를 직접 부르며 넓은 강당에서 춤 연습을 했다. 아직 일정도 잡히지 않은 봄 소풍을 준비했다. “네가 반장이니?” “네.” “내가 이곳에 근무하고 나서 일반 아이들이 놀러 온 것은 너희들이 처음이야.” 처음이었으나 그곳에서는 마지막 연습이 되었다. 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보육원 근처는 가지 말라고, 사실 보육원 대문을 들어서며, 나도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긴 했다. 학부모님들은 선생님께 일렀고, 우리는 교실에서 일정이 아직 잡히지 않은 봄소풍 장기자랑 연습을 했다.
스무 살에 아버지를 여윈 나는 서른다섯 살 오랑이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나뭇잎 돋듯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저 세계의 영혼들이 아주 작고 연약한 작은 부리로 후후 불면서 낭썹 돋듯 이 세상 가까이 다가온다는 미신을 알았다. 그렇게 빛나는 미신 한 방울 정도는, 귓불에 붙이고 반짝이는 햇살처럼 장식할 줄 아는 환한 이승의 사람이었으니까.
가족 공동묘지에 아버지 재를 묻었지만 봄에는 쑥 캐는 언니들 바라보며 담배 피우던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었고, 여름이라 소나기 내리면 겉옷을 벗고 나를 덮은 채 달리던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죽은 아버지는 시의적절 바뀌며 나타났다. 훗날 아들을 키우면서는 계절 정도가 아니라 시시각각 아버지가 등장했다. 이미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일, 가령 “아버지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다”라는 말을 내가 아들에게 다시 말할 때 보일러 온수에 빨간 불이 들어차듯 나는 마냥 따뜻해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나에게 한 일들은 아버지가 앉았다 일어선 방석처럼 따뜻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죽은 오랑은 달랐다. 죽은 오랑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진흙 위 맨발로 서 있는 기분이다. 흙탕물을 마시는 기분이다. 그냥 가만히 서 있으라고, 진흙이 가득한 물잔을 그냥 가만히 두라고, 그런 감정은 곧 침전할 것이라고, 결국 맑아질 것이라고 나의 깊은 우울을 이해하는 사람은 조언해주었다. 하지만 나마저 오랑이를 잊어버린다면, 오랑이가 저승에서도 침몰할 것 같다.
오랑이는 제주도 친척집에 잠시 맡겨졌다가 보육원에서 살게 되었다. 열아홉 살이 되자 보육원을 나와 우리 집으로 왔다. 보일러가 없는 창고로 쓰던 작은 방을 정리하자 오랑이의 새 방이 되었다. 오랑이는 그 방에서 살았다. 이듬해 우리는 스무 살이 되었고, 나는 대학 새내기가 되어 주말에나 오랑이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랑이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해 봄 나는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 병간호하기 위해 휴학을 했다. 병원이 멀어서 여전히 서귀포 집은 가지 못하고 간병인 침대 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머무를 때 우리 가족은 집에 머물지 못했다. 우리 빈집을 오랑이가 지켰다.
스무 살 여름 장마에 비가 새고 있다는 것도 오랑이가 알려주었다. 오랜만에 집에 가보니 아버지 책상이 놓여 있던 안방은 곰팡이로 가득했다. 오랑이와 함께 곰팡이를 닦고 집을 정리했다. 오랑이와 함께 살며 나는 오랑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해 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한동안 오랑이는 우리 집에 살았다. 그래서 오랑이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다시 주말에나 가끔 오랑이를 보았다. 대학에서 배운 문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나는 센 척했고, 오랑이는 그냥 셌다. 오랑이는 남자랑 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는데,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 표정이 자신은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서툰 각오가 가득한, 센 척하는 표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센 척하면 뭐 하냐, 오랑이는 독했지만 결국 죽었다. 진짜 독해서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시신을 발견한 사람들은 오랑이 얼굴이 콩자반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고 말했다.
제주도 도련동 어딘가에는 영아원이 있다. 지형이 동그랗게 생긴 들이 있어, 도련평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외도동 어딘가에는 보육원이 있다. 동그란 자갈이 자구르르 구르는 알작지가 근처에 있다. 오랑이는 우리 집을 떠나 육지로 올라가 기숙사 공장에서 자주 일했다. 그래서 오랑이의 새로운 방으로 자주 놀러 가지 못했다. 가끔 오랑이가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면 살림방이 생기기도 했는데, 보통 방이 하나라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낯선 도시로 오랑이를 만나러 가던 날들이 생각난다. 오랑이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리자 나는 어디에서 오랑을 찾아야 할지 몰라 낯선 지역에 도착하면 고아원이 어디에 있는지 자주 살펴보게 된다.
다섯 살이던 아기를 위탁하던 시절에 밤이 늦어도, 새벽까지 잠들지 않는 아이가 걱정이었다. 책을 읽어주고, 손전등으로 그림자극을 만들어주고, 등에 업고 어둠 속을 서성거려도 새벽까지 잠들지 않았다. 하루는 언니에게 “9시, 늦어도 10시면 잠을 자기 시작했을 텐데 왜 이렇게 잠을 자지 못할까” 물었다. 옆에서 그 말을 엿듣던 다섯 살 아이가 말했다. “8시에 잤어요.” 우리는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정말? 8시에 자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일찍? 잠 안 오면 어떻게 했어?” 아이는 말했다 “불 끄면 잠든 척하고 있었어요. 눈 감고 있다가 아무도 없으면 놀아야지 생각하는데, 눈 뜨면 아침이 되어 있었어요.”
나는 자는 척하다가 죽을 것이다. 아침이 될 것이다. 아침이 되어서, 내가 만질 수 없었던 아이의 다섯 살 이전의 저녁 여덟 시 이후가 될 것이다. 모든 밤이 향하는 아침이 될 것이다. 지구에 내가 없더라도 아이가 지구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한, 단 한 번도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아주 까마득한 너의 어린 시절의 저녁 8시 이후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가족사진을 찍으러 목포에 갔다. 목포는 나무가 가득한 숲이라 그러던데, 오랑이는 목포에서 태어났으니 아마도 새가 되었을 것이다. 목포항 근처 서산동에 이르니 큰 포데기 펼친 듯 비탈진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랑아, 너도 누군가의 등에 업혀 지내던 시절이 있었겠지. 너의 생모와 생부가 헤어지지 않았던 다섯 살 전에는 말이야.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감촉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자. 우린 다 죽었으니까 그런 감촉이나 이야기 나누며 내내 죽어 있자.
오랑아, 나에게도 숲에서 아이가 새처럼 날아왔어. 내 손에 가득 담긴 아이가 연필심처럼 뚝뚝 소멸하듯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아이는 다섯 살에 날아왔어. 우리가 아직 어색한 가족을 연습하고 있을 때 말이야. 조금이라도 큰 목소리를 내면, 아이는 두 팔을 독수리처럼 벌리고 몸집을 부풀리며, 무서운 눈빛으로 나에게 대항하듯 다가왔지. 그 아이를 보면, 어디서 많이 보았던 눈동자야, 그 눈빛, 높은 곳에서 겁도 없이 뛰어내리던 오랑이 너의 눈동자, 우리가 처음 만난 6학년 시절에, 우리는 항상 한편이었지. 둘이 한편일 때 아무도 우리를 이길 수 없었어. 너는 우리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담력을 가진 아이, 넌 정말 세상 아무도 두렵지 않은 고독한 눈동자로 그렇게 살다가 저세상으로, 그 숲으로 날아갔구나.
*오랑은 본명이 아니다. 호랑이를 닮은 아이라서 오랑이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