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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3 깔고앉은 자리가 싸든 비싸든.jpg

태국여행기 4~6

태국여행기 4~6

 

  2017년 10월 2일-태국여행기 4

 

  돈 아끼는 데 재미 들리면 거지꼴 못 면한다2

 

  나 혼자니까, 하고 숙박비를 포함해서 하루에 3만원 정도만 쓰기로 했다. 태국돈으로 하면 약 1,000밧 정도.

  그동안의 숙박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집을 떠난 첫날밤엔 공항로비에서 노숙, 카오산로드에서는 400밧 짜리 부엌 뒷방, 셋째날밤은 덜컹덜컹 달리는 야간완행열차에서 습한 풍토바람을 맞으며.

  그리고 넷째날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원래 목적지가 이곳이었던지라 여행준비를 하는 동안 아고다(구글맵을 이용해 숙소를 예약하는 앱)을 통해 봐 두었던 숙소가 여럿 있었다. 최대한 저렴한 쪽으로 알아두긴 했지만 가격에 상관없이 정말 마음에 드는 곳도 두어개 골라두었었다.

 

  기차의 좌석이 정방향이었던 탓에 에어컨 없이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16시간 동안 온 얼굴로 받아내지 않았다면 모르겠다. 또 아직 숙소를 정하지 않은 채 치앙마이의 바람 한 점 거리에 서서 땀을 뻘뻘 흘리지 않았다면 모르겠다. 나는 아고다에 저장해둔 여러 후보 숙소들 중에서 가격에 상관없이 마음에 들어 골라두었던 숙소를 잡고 말았다. 그래도 한국 돈으로 하면 28,000원 정도 태국돈으로 800밧이다.

  전통의상을 입은 예쁜 아가씨가 맨발로 마룻바닥을 종종 걸어가는 뒤를 따라 안내받은, 태국전통의 느낌과 빈티지한 취향이 한데 어우러진 방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갈등에 빠졌다. 하루에 쓰기로 한 1,000밧 중에서 800밧을 숙박비로 쓰게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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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 반들반들한 마룻바닥이 유난히 마음에 들었던 치앙마이의 800밧짜리 첫 숙소.

 

  2017년 10월 3일-태국여행기 5

 

  돈 아끼는 데 재미 들리면 거지꼴 못 면한다3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룻바닥에 캐리어를 눕혀놓고 짐을 풀면서, 그동안 못했던 빨래무더기를 꺼내 욕실이 흥건해질 때까지 빨래를 하면서도 나는 계속 갈등을 했다. 그리고 침대의 네 귀퉁이에 솟아있는 장식기둥에 빨래를 널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이 빨래들이 다 마를 때까지만 이곳에 있기로. 한 이틀 정도 짧은 시간이나마 이곳에서 나는 마음을 뽀송뽀송하게 말리고 떠날 생각이었다.

  문제는 다음 날, 축축한 빨래를 만지작하다가 하루를 더 예약하기 위해 카운터로 내려갔을 때 발생했다. 어제의 그 예쁘장한 태국아가씨가 갸름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쓰던 방이 오늘 오후에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다른 모든 방들도 다 차 있다며 머리를 찰랑찰랑 흔들었다.

  나는 얼른 방으로 뛰어올라가 다시 아고다를 뒤졌다. 그동안 검색해두었던 숙소들 중 다수가 주말을 맞아 차 있거나 가격이 올랐거나 였다. 그리고 찬찬히 보니 지금 묵은 숙소가 내 기준에는 비싼 것이지만 같은 수준의 다른 숙소들에 비하면 정말 참한 가격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카운터로 뛰어내려가 언제 방이 비는지 물었다. 다행히 내일 비는 방이 있다고 한다. 우선 나는 얼른 그 방에 빨래줄을 걸었다. 나중에 마음이 다시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리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조금은 안정된 마음으로 오늘 하룻밤을 때울 곳을 다시 검색했다. 그러다 내 눈이 번쩍 뜨인 숙소. 280밧(1만원 정도)에 재래시장 근처에 있으며 골동품점을 같이 운영하는, 지금과 같은 빈티지 취향이 아니라 빈티지 정품 자체인 곳. 사진을 보니 카운터겸 골동품 매장인 1층에는 태국 특유의 어둡고 섬세하며 먼지가 가득한 골동품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고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과 복도에는 태국 국왕과 그 일가의 흑백사진들과 70년대의 광고포스터들이 불투명한 유리액자에 갇힌채 벽면에 빈 공간 없이 걸려있었다. 이용자 후기를 읽어보니 태국의 진정한 로컬을 맛볼수 있단다. 그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 내가 마음이 현혹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번듯한 곳에서 편히 쉬자고 여행을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직 마르지 않은 빨래들을 둘둘 말아 가방에 쑤셔넣고는 멋진 빈티지풍의 방열쇠를 카운터에 반납한 후 미련없이 그곳을 떠났다.

 

  2017년 10월 4일-태국여행기 6

 

  돈 아끼는 데 재미 들리면 거지꼴 못 면한다4

 

  “그래, 나도 한물 간 여행자니까” 하며 캐리어가 훨씬 편할 것이라는 나와 시어머니의 말에 남편도 수긍을 했었다. 그래서 들고 가게 된 시어머니의 캐리어가 치앙마이의 얽은 도로를 견디지 못하고 며칠만에 결국 바닥이 너덜너덜해졌다. 그곳에서 덜덜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캐리어를 끌고가는 여행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빈티지풍의 숙소를 나온 후 흙먼지 이는 도로를 덜덜거리며 교회를 찾아 예배를 본 후 다시 요란한 소리로 핑강의 다리를 건너 나는 정오쯤 골동품점 숙소에 도착했다. 붉은 루즈를 짙게 칠하고 눈썹문신 아래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앉아있던 아주머니에게 열쇠를 받은 후 70년대 코카콜라광고 액자가 줄지어 걸려있는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 맨 끝 방의 문을 열자 ‘돈 아끼는데 재미 들리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남편의 말이 멀리서 메아리쳐 들려오는 듯 했다. 그곳은 방금 내가 버리고 온 숙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가난이 푹푹 빠지는 마가리였다. 자줏빛 시트가 씌워진 침대와 곰돌이가 그려진 겨울담요(!), 2층 창문 밖에서 솔솔 풍겨오는 실개천 냄새와 어릴 때부터 내가 제일 싫어했던 종류의 머리땋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천 발닦개. 나는 우선 그 발닦개부터 두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화장실 구석에 던져 넣었다. 문이 닫기지 않는 화장실은 침대 머리맡에서 딱 한걸음이었다. 그 한걸음 사이의 벽에 면해 책상 하나가 꽉 끼어 있었다. 나는 그 책상을 보며 책상 앞 창밖에서 풍겨오는 실개천 냄새를 맡으며 고행하듯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책상 위로 창밖의 넓은 활엽수 그림자가 무겁게 흔들렸다.

6일차 : 태국 왕조의 유령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복도가 인상적이었던 치앙마이의 280밧짜리 로컬 숙소. 나 외엔 손님이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던 숙소에서 한밤중에 저 복도를 지나갔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2025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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